우리의 봄은 8bit 컬러의 투박한 모니터 화면 속에서 시작되었다.
화면을 가득 채운 푸른 골프장 잔디 위로 마우스를 바삐 움직이던 스물세 살의 미대 신입생. 그것이 나와 내 생애 가장 찬란했던 그녀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때 나는 대학 3학년, 스물여섯이었다. 세 살이라는 나이 차이는 스물과 서른 사이의 어떤 경계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녀의 맑은 눈망울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1980년대 후반, 당시만 해도 ‘스크린골프’라는 개념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지금이야 골목마다 간판이 걸려 있을 만큼 보편화된 기술이지만, 그 시절엔 이름조차 낯선 미지의 영역이었다.
나는 그 생소한 기술을 개발하는 벤처 회사에 일주일에 딱 한 번 출근하는 아르바이트생으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운명처럼 그녀를 만났다.

내가 전체적인 시스템의 뼈대를 설계하고 제어 루틴을 짜 내려가면, 그녀는 그 삭막한 좌표 공간 위에 숨을 불어넣었다. 모니터 구석구석에 나무를 심고, 잔디의 결을 살리고, 아스라이 먼 언덕의 전경을 그래픽으로 채워 넣던 그녀의 손길.
오직 기계음만 정적을 깨던 적막한 연구실에서, 그녀가 앉아 있던 자리만이 유독 환하게 빛나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하게 정돈된 연구실의 공기는 그녀의 맑은 샴푸 향기와 섞여 언제나 싱그러웠고, 일주일에 단 하루 출근하는 그날이 내게는 일주일 중 가장 숨 가쁘게 기다려지는 축제 같았다.
연구실 창문 너머로 불어오던 밤바람에는 늘 변진섭의 노래가 섞여 있었다. 라디오를 틀면 어디서나 그의 미성이 흘러나오던 시절이었다.
'홀로 된다는 것'이나 '너에게로 또다시'를 흥얼거리며 밤샘 작업을 하던 내 곁에서, 그녀는 늘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정작 그녀가 가장 사랑했던 음악은 따로 있었다. 그녀는 비틀즈(The Beatles)의 오랜 LP판을 사랑했다.
어쩌다 주말에 만나 대학가 골목의 어두컴컴한 음악 카페에 들어설 때면, 그녀는 수줍게 쪽지에 청음곡을 적어 DJ 부스에 전달하곤 했다.
턴테이블의 바늘이 틱 하고 얹어지며 레코드판의 잔잔한 잡음 사이로 'Yesterday'나 'Let It Be'가 흘러나올 때, 음악을 듣는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내 가장 큰 행복이었다.
카페 안의 주황색 스탠드 조명이 그녀의 야윈 어깨와 귀 밑으로 흘러내린 단발머리를 따스하게 비추던 그 풍경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내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박제되어 있다.
모든 사랑이 그렇듯, 우리에게도 시린 겨울 같은 날들이 찾아왔다.
사소한 오해와 자존심이 얽혀 격렬한 말다툼을 벌였던 어느 비 오는 오후였다. 상처 주는 말들을 쏟아내고 뒤돌아서던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화가 난 표정으로 우산을 받쳐 든 채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나는 그녀를 놓치면 영영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에, 품에 소중히 지니고 있던 카세트테이프 하나를 꽉 쥔 채 빗속을 달렸다.
마침 정류장에 버스가 도착했고, 그녀는 버스 뒷문 계단을 바삐 오르고 있었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가 돌아보지 않자, 나는 무작정 뻗은 손으로 계단을 오르던 그녀의 열린 가방 틈새로 테이프를 툭 집어넣었다.
엘튼 존의 '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가 녹음된 테이프였다.

미안하다는 그 한마디가 왜 그리도 어려웠던지, 말 대신 음악으로 내 바보 같은 마음을 전하고 싶었던 서툰 청춘의 고백이었다.
버스 창문 너머로 멀어지는 그녀를 보며 흘렸던 내 눈물이 빗물에 씻겨 내려가던 그날의 공기는 지금도 기억의 피부 위에 아릿하게 남아 있다.
우리는 참 많이도 만났다 헤어지기를 반복했던 4년의 시간.
서로가 없으면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다가도, 현실의 무게와 철없던 자존심 때문에 서로에게 날을 세우기도 했던 날들. 그 4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뜨겁고, 가장 아프며, 가장 순수하게 누군가를 사랑했던 계절이었다.
결국 밀려오는 세월의 파도 속에서 우리는 각자의 길로 흩어졌고, 서로의 소식조차 모른 채 긴 세월이 흘렀다.
지금은 어느새 머리칼은 하얗게 세고, 거울 속 얼굴에는 세월이 남긴 주름이 깊게 새겨졌다.
세상을 다 알 것 같은 나이가 되었음에도, 이상하게 가을바람이 불거나 비가 내리는 날 라디오에서 변진섭의 노래가 흘러나오면 내 시간은 마법처럼 스물여섯의 그 연구실로 되돌아간다.
길을 걷다 우연히 카페 문틈으로 비틀즈의 멜로디가 새어 나올 때면, 나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보며 그 시절 단발머리의 그녀를 찾곤 한다.
“그때 가방 속에 넣어두었던 내 마음을 너는 들었을까.
미안하다는 말이 그토록 어려워 노래 뒤에 숨었던 내 진심을 알고 있었을까.”
지금 그녀는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나와 함께 나이가 들어 어쩌면 눈가에 고운 주름이 잡힌 채, 누군가의 따뜻한 어머니이자 아내로 평온한 삶을 살고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다만, 아주 가끔은, 정말 아주 가끔은 그녀 역시 흐린 하늘을 바라보며 그 시절 우리가 함께 설계했던 그 푸른 골프장 화면과, 서툴렀던 삼십여 년 전의 나를 기억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내 청춘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아름다운 미대생.
지금은 전할 길 없는 그리움이 비 내리는 창가에 가만히 고인다.
그저 바람을 타고 내 간절한 안부가 그녀의 삶에 따스한 햇살로 닿기를,
그래서 그녀가 사는 세상이 늘 아늑하고 행복하기를 오늘도 조용히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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