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가을이었다.
저녁 여섯 시쯤이었다.
나는 집에 있었다.
창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선선한 바람이 방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귀를 울리던 매미 소리는 어느새 드물어졌고, 대신 어딘가에서 풀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책상 위에는 과제 도면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나는 하루 종일 컴퓨터 설계 과제를 하고 있었다.
그 당시는 컴퓨터를 공부하는 학생도 많지 않았고,
연필로 회로를 그렸다가 컴퓨터로 옮겼다
다시 계산하고.
설계도를 수정하고.그 일을 하루 종일 반복했다.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창밖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때 거실에서 어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친구 전화 왔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검은색 전화기가 놓여 있었다.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야.” 그녀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평소 같으면 먼저 웃으며 말을 걸었을 텐데.
목소리가 어딘가 가라앉아 있었다.
“어?”
“지금 뭐 해?”
“과제 하고 있었지.”
“아직도?”
“응.”
그녀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화선 너머에서 작은 숨소리만 들렸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나 학교 앞이야.”
나는 순간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여섯 시였다.
“학교?”
“ 응.”
“왜?”
“그냥.”
짧은 대답.
그녀는 늘 그랬다.
정작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는 “그냥”이라고 말했다.
나는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거기 있어. 갈게”
“응.”
잠시 침묵.
“ 알겠어.”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수화기를 내려놓는 순간에도 나는 무슨 일인지 알지 못했다.
⸻
급히 셔츠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
가을 저녁 공기가 생각보다 차가웠다.
버스를 타고 창가에 앉았다.
창밖으로 노을이 보였다.
붉은 하늘 아래로 건물들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왜 학교 앞에 있는지 생각했다.
과제 때문인가.
친구들과 다퉜나.
집에 무슨 일이 있나.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틀린 추측이었다.
그녀는 전혀 다른 이유로 나를 부른 것이었다.
⸻
학교 정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거의 넘어가고 있었다.

정문 앞 넓은 길에는 학생들이 드문드문 지나가고 있었다.
멀리 그녀가 보였다.
가방을 어깨에 걸친 채 서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누군가를 기다린 사람처럼.
나는 손을 들어 보였다.
그녀도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평소처럼 밝게 웃지는 않았다.
그저 내가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래 기다렸어?”
“아니.”
그녀는 짧게 말했다.
하지만 이미 한참 전부터 와 있었던 것 같았다.
⸻
우리는 학교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캠퍼스에는 저녁 공기가 내려앉고 있었다.
은행나무 잎 몇 장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녀는 평소보다 말이 많았다.
친구 이야기.
수업 이야기.
교수님 이야기.
축제 이야기.
이런저런 이야기를 계속 꺼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느 하나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마치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는데 주변만 맴도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루 종일 컴퓨터 설계 과제를 붙들고 있었던 내 머릿속에는 아직도 회로와 계산식만 가득했다.
⸻
“과제 힘들어?”
그녀가 물었다.
“응. 이번 건 좀.”
“얼마나?”
“아침부터 하고 있었어.”
“오늘 하루 종일?”
“응.”
“나보다 과제가 더 중요하네.”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농담처럼.
하지만 웃는 눈은 아니었다.
나는 그저 같이 웃었다.
“과제 끝나면 편해지겠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침묵했다.
⸻
지금 생각하면.
그때 그녀는 서운했던 것이다.
우리는 운동장 옆 벤치에 앉았다.
가로등 불빛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
그녀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물었다.
“너는 내가 보고 싶을 때 없어?”
“왜?”
“그냥.”
또 그 말이었다.
그냥.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나는 그제야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화가 난 것도 아니고.
울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몹시 서운해 보였다.
⸻
“왜 ?”
내가 묻자 그녀는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끔은.”
“가끔은 내가 먼저 찾지 않아도 네가 찾아주면 좋겠어.”
나는 그 말을 듣고도 한동안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야 알게 되었다.
그날 그녀는 사랑을 확인받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다.
내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다만 그녀는 느끼고 싶었던 것이다.
말로.
행동으로.
관심으로.
보고 싶다는 한마디로.
그날 저녁 학교 정문에서 그녀가 기다리고 있었던 이유는 단순했다.
나를 만나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면.
자신이 내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몰랐다.
컴퓨터 설계 과제와 씨름하느라.
사랑받고 싶어 하는 사람의 마음을 읽을 만큼 아직 어른이 아니었다.
그리고 훗날 생각했다.
그녀가 그날 학교 앞에서 기다린 것은.
화를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내 얼굴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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