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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vasMe-Once Upon Love

시간을 잊은 두 사람

by 서창옥 : 전자공학자 2026. 6. 12.

광화문은 밤이 깊어질수록 오히려 조용해졌다. 낮 동안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하던 거리는 하나둘 불이 꺼지고, 자동차 소리도 뜸해졌다. 도심 한가운데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한산한 새벽이었다. 우리는 광화문 KT빌딩 앞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특별한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저녁을 함께 먹고 조금 걷다가 헤어질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이 금세 흘러갔다. 오랜 친구처럼 편안한 대화였다. 최근에 있었던 일들, 어린 시절 이야기, 앞으로 하고 싶은 일들, 별것 아닌 농담들까지 끝없이 이어졌다.

가끔은 대화가 끊기기도 했다. 하지만 어색하지 않았다. 서로 말없이 거리를 바라보거나 지나가는 택시를 구경하는 시간마저도 편안했다.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한 밤이었다.

밤공기가 조금 차가워질 무렵, 여자친구가 갑자기 말했다.

“우리 게임할래?”

“무슨 게임?”

“이마 때리기 게임.”

어릴 적에 하던 단순한 놀이였다.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긴 사람이 상대방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 때리는 게임. 유치하지만 이상하게 승부욕을 자극하는 놀이였다.

우리는 웃으며 게임을 시작했다.

첫 판은 내가 이겼다.

“아!”


여자친구는 이마를 감싸 쥐며 웃었다.

“봐줬지?”

“거짓말.”

두 번째 판도 내가 이겼다.

세 번째 판도.

네 번째 판도.

처음에는 장난으로 시작했지만 점점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여자친구는 연달아 지고 있었고, 나는 연달아 이기고 있었다.

“이상하다.”

여자친구는 진지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오늘 운이 왜 이래?”

“그냥 내가 잘하는 거 아닐까?”

“가위바위보를 잘하는 사람이 어딨어.”

그 말에 둘 다 웃었다.

게임은 계속되었다. 여자친구는 질 때마다 이마를 맞았고, 나는 점점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어느 순간 보니 여자친구 이마가 살짝 붉어져 있었다.

“그만할까?”

내가 물었다.

“왜?”

“이마 빨개졌잖아.”

여자친구는 휴대폰 화면을 거울처럼 비춰 보더니 웃었다.

“괜찮아.”

“안 괜찮은 것 같은데.”

“괜찮다니까.”

그러더니 다시 손을 내밀었다.

“한 판 더.”

이상한 사람이었다.

보통은 아프다고 그만하자고 할 법도 한데 오히려 더 하자고 했다. 승부욕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히 함께 노는 시간이 즐거워서였는지 알 수 없었다.

다시 가위바위보를 했다.

그리고 또 내가 이겼다.

“아!”

여자친구는 이마를 감싸며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내가 일부러 이기는 것도 아니잖아.”

“이번에는 내가 이길 것 같았는데.”

그 말에 나도 웃었다.


사실 나도 조금 당황스러웠다. 이렇게까지 계속 이길 줄은 몰랐다.

여자친구의 이마는 점점 붉어졌다.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보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다음 판에서는 일부러 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가위바위보를 준비하면서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상대가 무엇을 낼지 예상해서 져 주면 될 것 같았다.

“하나, 둘, 셋!”

하지만 결과는 또 내가 이겼다.

“말도 안 돼!”

여자친구가 소리쳤다.

나는 어이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일부러 지려고 했는데도 이겨 버렸다.

“진짜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알아.”

여자친구도 웃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몇 번이나 더 게임을 했다. 승패보다 웃음이 더 많았다.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서로를 바라보며 웃는 시간이 좋았다.

새벽은 점점 깊어졌다.

사람들의 발길은 완전히 끊겼고, 넓은 광화문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신호등만 묵묵히 색을 바꾸고 있었다. 멀리 세종대로의 불빛이 희미하게 반짝였다.

우리는 벤치에 앉아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다.

좋아하는 영화 이야기.

어릴 적 꿈 이야기.

학창 시절 실수담.

가족 이야기.

앞으로 살아가면서 하고 싶은 일들.

주제는 끝이 없었다.

신기한 것은 시간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보통 사람과 오래 함께 있으면 언젠가 대화가 끊기기 마련인데, 그날은 달랐다. 이야기가 끝나면 또 다른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문득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4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나는 순간 눈을 의심했다.

“벌써 4시야?”

여자친구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진짜?”

휴대폰 화면을 확인한 그녀는 한참 동안 웃었다.

“우리 여기 얼마나 있었던 거야?”

생각해 보니 저녁 늦게 도착했으니 거의 다섯 시간 가까이 벤치에 앉아 있었던 셈이었다.

다섯 시간.

숫자로만 보면 긴 시간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한두 시간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만큼 대화가 즐거웠던 것이다.

나는 옆에 앉아 있는 여자친구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게임 때문에 맞았던 이마는 아직도 붉은 기운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좋은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은 특별한 장소가 필요 없다는 것을.

비싼 식당도, 화려한 여행지도 필요 없었다.

광화문 한복판의 평범한 벤치 하나면 충분했다.


그곳에서 우리는 다섯 시간을 이야기했고, 어린아이처럼 게임을 했고, 이유 없이 웃었다.

나중에 어떤 장면들은 잊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어떤 농담을 주고받았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날 새벽의 공기와 가로등 불빛, 그리고 붉어진 이마를 문지르면서도 웃고 있던 여자친구의 모습만큼은 오래 기억될 것 같았다.

어쩌면 사랑이라는 것은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그런 순간들로 이루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와 함께 앉아 끝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유치한 게임 하나에 웃음을 터뜨리고,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모른 채 같은 밤을 공유하는 것.

광화문의 새벽 벤치 위에서 우리는 그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 다섯 시간은,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면 어떤 화려한 여행보다도 더 선명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