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귄지 여섯 달쯤 되었을 때였다.
그때의 서울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컴퓨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세운상가는 일종의 성지 같은 곳이었다. 대기업에서 나오는 완제품 컴퓨터보다 직접 조립한 컴퓨터가 더 빠르고 더 좋은 성능을 내던 시절이었다. IBM PC 호환기종이 널리 보급되면서 대만에서 들어온 마더보드와 각종 부품들이 세운상가 매장마다 가득 쌓여 있었다.
XT와 AT라는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뛰던 때였다.
주말이면 나는 여자친구와 종종 종로나 을지로 일대를 걸었다. 그날도 특별한 약속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세운상가에 가서 새로운 부품이 들어왔는지 구경하고, 컴퓨터 잡지도 보고, 가끔은 가격표를 들여다보며 언젠가 갖고 싶은 시스템을 상상하는 것이 즐거웠다.
여자친구는 컴퓨터를 잘 아는 편은 아니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에 관심을 가져 주었다.

세운상가의 좁은 복도를 걸을 때 작은 스피커에서는 게임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매장 안에서는 기술자들이 케이스를 열어 컴퓨터를 조립하고 있었다.
그런 풍경 속을 여자친구와 나란히 걷고 있었다.
그러다 한 컴퓨터 매장 앞에서 누군가가 여자친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 여기 웬일이야?”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매장 안에 있던 한 여성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여자친구도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언니?”
그제야 나는 그분이 여자친구의 언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옆에는 형부가 함께 계셨다.
언니와 형부도 컴퓨터를 알아보러 세운상가에 들른 것이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여자친구가 먼저 나를 소개했다.
“언니, 형부. 이 사람이 내가 이야기했던 사람이야.”
순간 조금 긴장되었다.
가족을 만난다는 것은 언제나 그런 법이다.
나는 공손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그러자 형부가 먼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언니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 많이 들었어요.”
나는 괜히 얼굴이 뜨거워졌다.
무슨 이야기를 들으셨을까.
좋은 이야기였을까.
혹시 흉이라도 본 것은 아닐까.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아셨는지 형부가 웃으며 말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좋은 이야기만 들었어요.”
매장 안에 웃음이 퍼졌다.

잠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디 사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컴퓨터는 얼마나 좋아하는지.
평범한 대화였지만 이상하게 기억에 오래 남아 있다.
아마 그날 처음으로 여자친구의 가족이라는 존재가 조금 더 가까워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그날 기억나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조금 민망한 이야기다.
여자친구의 언니는 무척 아름다운 분이었다.
처음 뵈었을 때 솔직히 놀랄 정도였다.
키도 크고, 인상도 또렷했고, 웃을 때의 분위기도 참 밝았다.
한눈에 봐도 많은 사람들이 미인이라고 이야기할 만한 분이었다.
물론 내 눈에는 여자친구가 가장 소중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자면 언니는 누구라도 눈길이 갈 만큼 아름다운 분이었다.
그런 생각을 잠시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외모가 아니었다.
언니가 여자친구를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여동생을 아끼는 마음이 그대로 느껴졌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여동생을 어떻게 대하는지 조용히 살펴보고 있는 것 같았다.
형부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편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문득 생각했다.
아, 여자친구가 이런 가정에서 자랐구나.
그래서 사람을 배려할 줄 알고, 상대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작은 것에도 고마워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구나.
언니와 형부는 컴퓨터를 둘러본 뒤 먼저 일어나셨다.
헤어지기 전에 형부가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잘 사귀세요.”
짧은 한마디였다.
하지만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언니도 웃으며 말했다.
“둘이 정말 잘 어울려요.”
우리는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두 분이 복도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여자친구는 손을 흔들었다.
잠시 후 다시 둘만 남았다.
세운상가의 복도는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어디선가는 프린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고, 다른 매장에서는 새로 나온 하드디스크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나는 여자친구를 바라보았다.
“언니가 정말 널 많이 아끼는 것 같아.”
그러자 여자친구가 웃었다.
“당연하지.”
“형부도 좋은 분 같고.”
“응. 둘 다 나 엄청 예뻐해.”
여자친구는 어린아이처럼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 모습이 참 사랑스러웠다.
우리는 다시 복도를 걸었다.
컴퓨터 부품보다도 방금 만난 사람들 이야기를 더 많이 하면서.
그날 이후 삼십 년의 시간이 흘렀다.
XT와 AT는 역사 속의 이름이 되었고, 세운상가의 풍경도 많이 변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날의 장면은 선명하게 남아 있다.
좁은 컴퓨터 매장.
반갑게 맞아 주던 언니와 형부.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잘 사귀세요.”
그리고 그 말에 수줍게 웃던 여자친구의 얼굴.
지금도 세운상가 근처를 지나가면 문득 그날이 떠오른다.
컴퓨터를 보러 갔던 하루였지만, 돌아보면 그날의 주인공은 컴퓨터가 아니었다.
내가 사랑하던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을 사랑하던 가족들.
그 따뜻한 만남이야말로 세월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가장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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