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 연구실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프로젝트와 씨름하고 있었다. 예상보다 일이 훨씬 커졌다. 회로는 생각대로 동작하지 않았고, 프로그램은 수정할 때마다 또 다른 문제를 만들어 냈다. 며칠째 제대로 잠도 못 자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식어버린 커피컵이 여러 개 놓여 있었고, 컵라면 용기와 참고서적들이 뒤섞여 있었다. 언제 마지막으로 면도를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셔츠는 구겨져 있었고 수염은 덥수룩하게 자라 있었다.
문득 창밖을 보니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그때 연구실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나야.”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
유경이었다.
순간 피곤함 속에 묻혀 있던 정신이 조금 깨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뭐해?”
“프로젝트.”
“아직도 연구실?”
“응.”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유경이가 말했다.
“보고 싶어.”
짧은 한마디였다.
하지만 이상하게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졌다.
일주일 가까이 연구실에 갇혀 살다 보니 세상과 단절된 기분이 들었는데, 누군가 나를 보고 싶어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힘이 났다.
“학교 갈게.”
“지금?”
“응.”
나는 시계를 봤다.
저녁 8시.
원래라면 한 시간이라도 더 연구실에 붙어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프로젝트보다 유경이 얼굴이 더 보고 싶었다.
“학생회관으로 와.”
“알았어.”
전화를 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면대 앞에 잠깐 섰다가 포기했다. 지금 와서 면도를 할 시간도 없었다.
거울 속 내 모습은 말 그대로 엉망이었다.

학생회관 앞에 도착했을 때 나는 순간 걸음을 멈췄다.
유경이가 서 있었다.
검은색 치마와 밝은 색 블라우스.
정성껏 손질한 머리.
은은하면서도 세련된 메이크업.
그 모습이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나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일주일 동안 밤낮 없이 연구실 형광등만 보고 살다가 갑자기 봄날 같은 풍경이 눈앞에 나타난 기분이었다.
유경이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왜 그렇게 봐?”
“예쁘네.”
“오늘만?”
“아니.”
“그럼?”
“원래.”
유경이는 피식 웃으며 내 팔을 툭 쳤다.
“수염 엄청 났다.”
“알아.”
“잘생긴 친구가 완전 거지 됐네.”
그 말에 나도 웃었다.
이상하게도 피곤함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유경이는 가끔 내가 힘들 때 이렇게 나타났다.
마치 타이밍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내가 가장 지쳐 있을 때.
가장 자신감이 없을 때.
오히려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타나 웃게 만들어 주곤 했다.
그날도 그랬다.
우리는 학생회관 식당에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
솔직히 무슨 반찬이 나왔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그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밥을 먹었다는 것만 기억난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캠퍼스를 천천히 걸었다.
늦은 저녁의 캠퍼스는 낮과는 또 다른 분위기가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길게 늘어지고 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유경이 손을 잡았다.
유경이도 아무 말 없이 손가락을 맞물렸다.
우리는 그렇게 천천히 걸었다.
지나가던 학생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몇몇 남학생들은 유경이를 보고 다시 한번 고개를 돌려 쳐다보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보며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내 여자친구가 이렇게 인기가 많았나.’
자랑스럽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했다.
유경이는 원래 미대를 다녔다.
그래서인지 옷을 입는 감각이 남달랐다.
화려하게 꾸미는데도 전혀 과해 보이지 않았다.
튀지 않는데 눈길이 가고, 세련됐는데 부담스럽지 않았다.
색을 쓰는 감각도 좋았고 화장도 그날의 분위기에 맞게 자연스럽게 했다.
지금 생각해도 그런 감각은 타고나는 것 같다.
우리는 학교 앞 오래된 카페로 들어갔다.
요즘 카페처럼 넓고 탁 트인 구조가 아니었다.
그 시절 카페들은 작은 칸막이가 있어서 각각의 공간이 독립적으로 느껴졌다.
우리는 가장 구석 자리에 앉았다.
칸막이를 등지고 벽을 바라보는 자리였다.
마치 작은 방 하나를 빌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커피 향이 은은하게 퍼지고 있었다.
유경이는 턱을 괴고 나를 바라봤다.
나는 괜히 시선을 피했다.
너무 초라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유경이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힘들지?”
“아니. 괜찮아”
“얼굴이 반쪽 됐네.”
“ㅋㅋ.”
나는 커피잔을 만지작거렸다.
“끝이 안 보여.”
유경이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내 손등 위에 자기 손을 살며시 올려놓았다.
따뜻했다.
그 따뜻함이 이상하게 위로가 됐다.
“그래도 해낼 거잖아.”
“모르겠어.”
“아니.”
유경이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넌 해낼 거야.”
그 말에 나는 웃었다.
사실 근거는 없었다.
프로젝트가 성공할지 실패할지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이상하게 유경이가 그렇게 말하면 정말 될 것 같았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늦어졌다.
연구실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카페를 나와 버스 정류장까지 함께 걸었다.
버스가 도착했다.
유경이는 계단에 올라서며 뒤를 돌아봤다.
“또 연구실 들어가는 거지?”
“응.”
“끝나면 전화해.”
“알았어.”
“그리고.”
유경이가 웃었다.
“수염 좀 깎아.”
나는 크게 웃었다.
버스 문이 닫히고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경이는 창가 자리에 앉아 손을 흔들었다.
나도 손을 흔들었다.
버스가 멀어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연구실로 돌아가는 길.
프로젝트는 여전히 끝나지 않았고 해야 할 일도 산더미처럼 남아 있었다.
수염도 그대로였고 피곤함도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음만은 달라져 있었다.
누군가 나를 보고 싶다고 말해주고.
바쁜 시간을 내어 학교까지 찾아와 주고.
내 손을 잡아주고.
내가 해낼 수 있다고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다시 버틸 힘이 생겼다.
지금도 그날을 떠올리면 기억나는 것은 프로젝트가 아니다.
논문도 아니고 회로도 아니다.
학생회관 앞 가로등 아래 서 있던 유경이의 모습.
그리고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던 짧은 한마디.
“보고 싶어.”
그 한마디가 그 시절의 긴 밤을 견디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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