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CanvasMe: Memories, Technology, and Life
  • CanvasMe: Memories, Technology, and Life
  • CanvasMe: Memories, Technology, and Life
CanvasMe-Once Upon Love

1991년의 이태원

by 서창옥 : 전자공학자 2026. 6. 21.


여자친구가 과제가 있다며 이태원에 가자고 한 날이었다.

수업이 끝난 뒤 우리는 지하철을 타고 이태원으로 향했다. 지금처럼 스마트폰을 꺼내 아무 때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디지털카메라도 흔하지 않았고, 여자친구가 들고 온 것은 자동 필름카메라 한 대였다.


“교수님이 거리 풍경 찍어 오랬어.”

“과제 때문에 여기까지 오는 거야?”

“응. 근데 겸사겸사 데이트도 하고.”

그 말을 듣고 나는 웃었다.

카메라 안에는 36장짜리 필름이 들어 있었다. 셔터를 누를 때마다 필름이 한 칸씩 감겼고, 사진이 어떻게 나왔는지는 현상하기 전까지 알 수 없었다.


여자친구는 이태원역 출구를 나오자마자 카메라를 들었다.

찰칵.

영어로 적힌 간판.

찰칵.

언덕길을 따라 이어진 거리.

찰칵.

길가를 지나가는 사람들.

그녀는 마치 세상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주변을 바라보며 하나하나 사진에 담고 있었다.

나는 그런 모습을 옆에서 천천히 따라 걸었다.

당시의 이태원은 지금과 또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한국에 있으면서도 외국 어느 도시의 거리를 걷는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영어 간판들이 즐비했고, 평소 보지 못했던 물건들을 파는 가게들도 많았다.

여자친구는 걸음을 멈출 때마다 카메라를 들었다.

“이것도 찍어야겠다.”

찰칵.

“저것도 예쁘다.”

찰칵.

필름이 아까운 줄도 모르고 계속 셔터를 눌렀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필름 다 쓰는 거 아냐?”

“괜찮아. 좋은 사진 한 장 건지면 되는 거지.”

그녀다운 말이었다.

거리를 걷다 보니 외국인들도 많이 보였다. 군복을 입은 사람, 커다란 배낭을 멘 여행객, 친구들과 웃으며 걸어가는 사람들.

여러 나라의 언어가 거리 곳곳에서 들려왔다.

여자친구는 그런 모습도 놓치지 않았다.

찰칵.

찰칵.

“외국인도 찍어?”

내가 묻자 여자친구가 말했다.

“이태원이니까.”

그 말이 왠지 맞는 것 같았다.

그녀가 찍고 있었던 것은 단순한 과제 사진이 아니었다. 그 시절의 이태원 자체를 기록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골목길도 돌아다녔다.


작은 카페 앞을 지나고, 외국 식료품 가게에도 들어갔다.


진열장에는 처음 보는 과자와 음료들이 가득했다.

여자친구는 신기한 음료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거 마셔볼래?”

“맛없을 수도 있는데.”

“그래도 궁금하잖아.”

결국 하나를 사서 나눠 마셨다.

예상대로 별로였지만 우리는 한참 웃었다.

그날의 이태원은 모든 것이 새로워 보였다.

햇빛이 건물 벽에 비치는 모습.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

가게 앞에 걸린 작은 깃발들.

창문에 비친 거리 풍경.

여자친구는 그런 것들을 차례차례 필름 속에 담아 갔다.

36장.

35장.

34장.

필름은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쉽게 셔터를 누르지 않았다.

한참을 바라보다가 정말 마음에 드는 장면이 나타나면 그때서야 카메라를 들어 올렸다.

그래서인지 한 장 한 장이 더욱 소중해 보였다.

해가 기울 무렵 우리는 언덕 위에 올라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붉은 노을이 건물과 간판 위로 내려앉고 있었다.

여자친구는 마지막으로 카메라를 들었다.

찰칵.

그 사진에는 무엇이 담겼을까.

노을 진 이태원의 풍경이었을까.

아니면 함께 걸었던 우리의 시간이었을까.

지금은 누구나 스마트폰으로 수백 장, 수천 장의 사진을 찍는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필름 한 장 한 장이 특별했다.

사진이 잘 나왔을지 궁금해하며 현상소를 기다리던 시간도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과제를 한다며 필름카메라를 들고 이태원 거리를 바쁘게 돌아다니던 여자친구의 뒷모습과 카메라를 들고 환하게 웃던 그녀의 모습이 생각난다.

'CanvasMe-Once Upon Love'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논현동 중국성에서 보낸 특별한 하루  (0) 2026.06.23
편지  (0) 2026.06.23
성북동 곰의집  (0) 2026.06.22
장미꽃 몇 송이  (0) 2026.06.21
여자 친구의 눈웃음  (0) 2026.06.19
케익  (0) 2026.06.18
여자친구를 보면, 오래전의 나를 떠올리다  (0) 2026.06.18
일주일째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0) 2026.0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