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가을이었다.
당시 나는 대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연구실과 강의실을 오가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낮에는 수업을 듣고, 저녁에는 실험을 하고, 밤이 되면 연구 데이터를 정리하거나 논문을 읽었다. 젊음 하나만 믿고 살던 시절이었다. 미래에 대한 꿈은 컸지만 현실은 늘 바빴고,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를 만큼 정신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날도 연구실에 남아 있었다. 시계를 보니 밤 9시쯤이었다. 연구실에는 몇몇 대학원생들이 남아 있었고,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각자 자신의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때 연구실 전화가 울렸다.
늦은 시간에 걸려오는 전화는 흔치 않았다.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잠시 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야.”
“어, 유경아.”
“나 지금 학교 근처 화실인데.”
유경이는 미술을 전공하고 있었다. 학교 근처 작은 화실에서 자주 그림을 그렸는데, 한번 붓을 잡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작업에 몰두하는 성격이었다.
“아직도 그림 그리고 있어?”
“응.”
목소리에는 피곤함이 묻어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유경이가 말했다.
“나 케이크 먹고 싶어.”
순간 웃음이 나왔다.
“응. 그림 그리고 있는데 갑자기 너무 먹고 싶어졌어.”
“저녁은 먹었어?”
“아직.”
역시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리는 사람이었으니까.
“사갈께.”
“정말?”
“응.”
“고마워.”
전화를 끊고 나는 연구실을 나왔다.
학교 정문 앞 빵집은 아직 문을 닫지 않고 있었다. 따뜻한 빵 냄새가 가게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진열장 안에는 생크림 케이크와 초콜릿 케이크, 치즈 케이크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나는 유경이가 좋아하던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골랐다.
하얀 상자에 담긴 케이크를 들고 화실로 향했다.
화실은 오래된 건물 3층에 있었다.
계단을 올라가며 문득 웃음이 났다.
밤 9시에 전화해서 케이크가 먹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
그게 바로 유경이였다.
남들은 민망해서 하지 못할 말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사람.
좋아하는 것은 좋아한다고 말하고, 싫은 것은 싫다고 말하고, 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그냥 연락하는 사람이었다.
3층에 도착해 화실 문을 밀고 들어갔다.
유화 물감 냄새와 테레빈유 냄새가 섞여 있었다.

정말 행복해 보였다.
나는 그런 모습을 보며 웃었다.
“그렇게 맛있어?”
“응.”
“오늘 그림은 잘 돼?”
유경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왜?”
“계속 마음에 안 들어.”
“그래도 계속 그리고 있었잖아.”
“응.”
“그럼 언젠가는 마음에 드는 그림이 나오겠지.”
유경이는 웃었다.
“넌 늘 그렇게 말해.”
“그랬나 ”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창밖으로는 가을밤 바람이 불고 있었고 멀리 운동장 가로등 불빛이 보였다.
화실 안에는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유경이는 케이크를 먹으며 나를 바라보다가 문득 말했다.
“이상하지?”
“뭐가?”
“밤 9시에 전화해서 케이크 먹고 싶다고 한 거.”
나는 웃었다.
유경이는 잠시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조금은 수줍은 표정으로 말했다.

“보고 싶어서 그랬어.”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케이크가 먹고 싶다는 말이 전부인 줄 알았다.
그림을 그리다 출출해져서 전화한 줄 알았다.
하지만 그 한마디를 듣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그날 유경이가 원했던 것은 케이크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늦은 밤 화실에서 혼자 그림을 그리고 있다가 문득 누군가가 생각났고, 그 사람이 보고 싶어졌던 것이다.
그래서 케이크를 핑계 삼아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유경이는 다시 케이크를 한 입 먹으며 웃었다.
마치 별것 아닌 이야기를 한 사람처럼 태연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내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괜히 창밖을 바라보며 시선을 돌렸다.
가슴 한쪽이 따뜻해지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날 밤 우리는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림 이야기.
학교 이야기.
미래에 대한 이야기.
별것 아닌 농담들.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수많은 이야기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날 유경이가 했던 한마디만큼은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난다.
“보고 싶어서 그랬어.”
세월이 많이 흘렀다.
그날 연구실에서 무엇을 연구하고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떤 논문을 읽고 있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딸기 생크림 케이크가 담긴 상자를 들고 화실 계단을 올라가던 모습과, 나를 보며 환하게 웃던 유경이의 얼굴, 그리고 수줍게 고백하듯 말하던 목소리는 아직도 생생하다.
어쩌면 사람의 기억 속에 오래 남는 것은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그런 순간들인지도 모른다.
1989년 어느 가을밤.
물감 냄새가 가득한 작은 화실.
그림에 지쳐 있던 한 여학생.
그리고 케이크를 핑계로 걸려온 전화 한 통.
“보고 싶어서 그랬어.”
그 짧은 한마디는 그날 밤 먹었던 케이크보다 훨씬 더 달콤하게 내 마음속에 남았다.
'CanvasMe-Once Upon Love'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성북동 곰의집 (0) | 2026.06.22 |
|---|---|
| 장미꽃 몇 송이 (0) | 2026.06.21 |
| 1991년의 이태원 (0) | 2026.06.21 |
| 여자 친구의 눈웃음 (0) | 2026.06.19 |
| 여자친구를 보면, 오래전의 나를 떠올리다 (0) | 2026.06.18 |
| 일주일째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0) | 2026.06.17 |
| 양수리의 밤 (0) | 2026.06.17 |
| 포천 산정호수로 향한 작은 여행 (0) | 2026.06.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