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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vasMe-Once Upon Love

장미꽃 몇 송이

by 서창옥 : 전자공학자 2026. 6. 21.



1991년 봄이었다.

그날은 수업이 일찍 끝나는 날이었다. 저녁 7시에 여자친구와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장소는 여자친구 집 앞에 있는 작은 카페였다.

당시에는 휴대전화가 없었다.

누군가를 만나려면 시간을 정확히 지켜야 했고, 약속을 바꾸려면 공중전화를 찾아야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약속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했다.

삐삐:숫자만 찍힌다 그래서 천사1004,빨리8282


수업을 마치고 학생회관 앞을 지나는데 허리춤에 차고 있던 삐삐가 울렸다.

액정에 찍힌 번호를 보니 낯익은 번호였다.

나는 근처 공중전화로 가서 동전을 넣고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친구의 여동생이었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동생이었다. 친구 여동생이다.
친구보다 더 친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친남매처럼 편하게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그 동생은 종로 YMCA에서 일본어 담당 선생님으로 일하고 있었다. 일본어 실력이 워낙 뛰어나 일본인들과도 자연스럽게 대화했다. 일본을 오가며 알게 된 사람들도 많았고, 평소 친분을 이어오던 일본 국립대 교수들도 몇 분 있었다.

“오빠, 나야.”

“어, 무슨 일이야?”

“잠깐 볼 수 있어?”

"어디로 갈까?“

“YMCA 근처 카페.”

나는 시계를 보았다.

여자친구와의 약속까지는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 있었다.

“지금 학교에서 출발할께. 대략 2-30분 걸릴꺼야.”

"응”

종로에 도착해 카페 문을 열자 동생이 먼저 와 있었다.


“오빠 일본 대학 석박과정 유학 갈 생각 없어?”

나는 웃었다.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동생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아깝네.”

“뭐가?”

“내가 아는 일본 교수님이 학생 찾고 있거든.”

“그래서?”

“오빠 이야기 했어.”

“내 이야기를?”

“응.”

나는 웃으며 물었다.

“뭐라고 했는데?”

“전자공학에 미쳐있고 ”
“전문잡지책에 연재도 했고”
“책도 출간했고. 엄청잘난척하고 ㅋㅋ”
알고있는것 전부..

“교수님 좋아 하시던데”

“그래?”

“응. 괜찮은 학생 같다고.”

나는 괜히 쑥스러워졌다.

사실 유학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만 누군가가 나를 좋게 평가했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잠시 일본 이야기와 학교 이야기, 앞으로의 진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동생이 갑자기 물었다.

“오빠.”

“왜?”

“오늘 시간 돼?”

“왜?”

“맥주 한잔하게.”

나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슬슬 약속 장소로 가야 할 시간이었다.

“미안 오늘은 안 돼.”

“약속 있어?”

“응.”

“누구랑?”

“친구.”

동생은 피식 웃었다.

“그럴 줄 알았어.”

그러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

“어디 가?”

“금방 와.”

동생은 카페 밖으로 나갔다.

몇 분 뒤 다시 들어온 동생 손에는 작은 장미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붉은 장미꽃 몇 송이였다.

“이게 뭐야?”

동생은 꽃다발을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여자친구 줘.”

“왜?”

“그냥.”

“오늘 무슨 날도 아닌데?”

동생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빠는 진짜 여자 마음을 몰라.”

“내가?”

“응.”

“왜?”

“여자들은 이런 거 좋아해.”

나는 꽃다발을 내려다보았다.

“장미 몇 송이인데?”

“그 몇 송이가 중요한 거야.”

동생은 웃으며 말했다.

“생일이나 기념일에 받는 꽃도 좋지만 아무 날도 아닌데 받으면 더 감동해.”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가?”

동생은 한숨을 쉬었다.

“오빠 큰일이다.”

“뭐가?”

“여자친구가 착해서 다행이지.”

둘 다 웃었다.

“아무튼 꼭 줘.”

“알았어.”

“약속.”

“약속.”

나는 꽃다발을 들고 카페을 나왔다.

버스를 타고 여자친구 집 근처로 향했다.

창밖으로 저녁 햇살이 천천히 기울고 있었다.

약속 장소인 카페에 도착하니 여자친구는 이미 와 있었다.

창가 자리에 앉아 있던 여자친구는 나를 보자 환하게 웃었다.

나는 자리에 앉기 전에 꽃다발을 내밀었다.

“이거.”


여자친구는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어?”

“받아.”

“나 주는 거야?”

“응.”

여자친구는 조심스럽게 꽃을 받아 들었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꽃을 바라보고,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날인데?”

“아무 날도 아닌데.”

“그런데 꽃을?”

“그냥.”

순간 유경이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 표정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놀라움과 기쁨, 그리고 감동이 한꺼번에 담긴 표정이었다.

꽃을 품에 안은 유경이는 한참 동안 꽃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고마워.”

잠시 뒤 다시 말했다.

“정말 고마워.”

그날 우리는 평소처럼 저녁을 먹고 거리를 걸었다.

하지만 유경이는 내내 장미꽃을 소중하게 들고 다녔다.

가끔 꽃향기를 맡으며 웃었고, 꽃잎을 바라보며 행복해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종로에서 만난 동생의 말이 떠올랐다.

“오빠는 진짜 여자 마음을 몰라.”

어쩌면 맞는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장미꽃 몇 송이가 사람을 그렇게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그날 처음 알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문득 생각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꼭 비싼 선물이나 거창한 이벤트가 아닐지도 모른다.

가끔은 아무 이유 없이 건네는 작은 마음 하나면 충분하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려 준 사람은 친구의 여동생이었다.

덕분에 나는 그날 평생 잊지 못할 유경이의 미소를 볼 수 있었다.

세월이 흘러 장미꽃은 오래전에 시들어 사라졌지만, 꽃을 받아 들고 환하게 웃던 그녀의 모습만은 아직도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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