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광화문에서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오랜만에 처음 일본 회사에서 함께 일했던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였다.
지금은 모두 각자의 길을 걷고 있었지만, 그 시절을 함께 보낸 사람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이 있었다.
모임 장소인 광화문의 카페로 들어서며 문득 처음 그 회사를 다니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공대 3학년이었다.
유경이는 미대 1학년 신입생이었다.
우리는 학생 신분으로 일본 회사의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었다.
단순히 사무실 심부름을 하거나 자료를 복사하는 아르바이트가 아니었다.
직원들과 함께 회의에 참석했고, 프로젝트의 일부를 맡아 실제 업무를 수행했다.
나는 기술 자료와 시스템 관련 업무를 담당했고, 유경이는 디자인과 시각 자료 제작에 참여했다.
학생이었지만 프로젝트 팀의 일원이었다.
처음에는 긴장도 많이 했다.
회의실에 앉아 직장인들 사이에서 의견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직원들은 우리를 학생이라고 무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의 팀원으로 대해 주었다.
덕분에 회사에 가는 것이 즐거웠다.
그리고 그곳에서 유경이를 만났다.
처음 출근하던 날이 아직도 기억난다.
미대 1학년답게 앳된 모습이었다.
긴장한 표정으로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지만 사람들에게 인사할 때는 환하게 웃었다.
동그란 눈.
밝은 미소.
처음 본 순간부터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 사람이 내 삶에서 그렇게 큰 의미가 될 줄은.
프로젝트를 함께 수행하며 우리는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회의 준비를 하며 함께 자료를 정리했고, 점심시간에는 직원들과 식사를 하러 나갔다.
프로젝트 마감이 가까워지면 늦은 시간까지 남아 작업을 하기도 했다.
광화문 거리를 걸으며 프로젝트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새 학교 이야기, 가족 이야기, 꿈에 대한 이야기까지 나누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서로에게 스며들었다.
그리고 연인이 되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이제 나는 공과대학 4학년이었다.
졸업과 취업을 앞두고 있었다.
유경이는 미술대학 2학년이 되어 작품과 과제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반면 함께 프로젝트를 수행했던 직원들은 대부분 사회인이 되어 있었다.
어떤 사람은 대기업에 취직했고, 어떤 사람은 일본계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으며, 어떤 사람은 해외 근무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날 모임은 더욱 특별했다.
학생이었던 시절의 기억과 사회인이 된 현재가 한자리에 모인 느낌이었다.

카페 안에는 이미 여러 직원들이 와 있었다.
“오랜만이다.”
“졸업 얼마 안 남았지?”
“시간 진짜 빠르네.”
반가운 인사가 오갔다.
나는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조금 복잡했다.
며칠 전 유경이와 작은 말다툼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소한 일이었다.
하지만 서로 연락하지 않은 채 며칠이 지나 버렸다.
평소 같으면 먼저 연락했을 텐데 이상하게 이번에는 둘 다 자존심을 부리고 있었다.
그때 카페 문이 열렸다.
유경이가 들어왔다.
순간 내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유경이도 나를 보았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직원들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사람들은 반갑게 맞아주었다.
우리가 사귀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회사에서 함께 프로젝트를 하던 시절에도 티를 내지 않았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우리는 평범한 옛 동료처럼 행동했다.
“안녕.”
“응, 안녕.”
짧은 인사.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 안에는 며칠 동안 연락하지 못했던 시간들이 담겨 있었다.
모임은 즐거웠다.
예전 프로젝트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밤새 작업하던 기억.
발표를 준비하던 기억.
회의실에서 치열하게 토론하던 기억.
당시에는 힘들었지만 지금은 모두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추억이 되어 있었다.
유경이도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웃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밝았다.
동그란 눈으로 사람을 바라보며 웃는 모습은 여전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도 자꾸만 유경이 쪽을 바라보게 되었다.
몇 번이나 눈이 마주쳤다.
그때마다 유경이는 살짝 웃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시선을 돌렸다.
밤이 깊어갔다.
모임도 끝날 시간이 되었다.
“다음에 또 보자.”
“졸업하면 연락하고.”
“유경씨도 학교생활 열심히 해.”
사람들은 웃으며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광화문의 밤거리는 조용했다.
직원들이 모두 떠난 뒤 유경이와 나는 자연스럽게 같은 방향으로 걸어갔다.
광화문 뒤편 골목.
가로등 불빛이 거리를 비추고 있었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하지만 그 침묵은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며칠 동안의 거리감을 조금씩 지워주는 시간 같았다.
주차장에 도착했다.
나는 운전석에 앉았다.
유경이는 익숙하게 조수석에 탔다.
문이 닫히자 세상과 분리된 듯한 조용함이 찾아왔다.
엔진은 걸지 않았다.
그냥 그대로 앉아 있었다.
잠시 후 유경이가 나를 바라보았다.
언제나처럼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리고 살짝 웃었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마음속에 남아 있던 서운함이 무너져 내렸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도.
화가 났을 때도.
걱정이 많을 때도.
유경이의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눈동자에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유경이는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보고 싶었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 나도 보고 싶었다.
유경이는 다시 말했다.
“너는 어떻게 연락 한 번을 안 할 수 있어?”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겨우 말했다.
“미안.”
유경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미안.”
그 한마디에 며칠 동안의 어색함이 눈 녹듯 사라졌다.
나는 유경이의 손을 잡았다.
유경이도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가로등 불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와 유경이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그날 따라 유경이의 눈은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처음 회사에서 만났던 미대 1학년의 모습이 떠올랐다.
프로젝트 회의실에서 긴장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신입생.
그리고 지금은 내 옆에서 미소 짓고 있는 사람.
나는 천천히 유경이를 안아주었다.
유경이는 아무 말 없이 내 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내 가슴에 얼굴을 기대었다.
우리는 그렇게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있었다.
말이 없어도 괜찮았다.
서로의 체온만으로도 충분했다.
문득 시계를 보았다.
새벽 두 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모임이 끝난 것이 밤 열 시쯤이었는데 벌써 네 시간이 지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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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이와 함께 있으면 늘 그랬다.
시간이 너무 빨리 흘렀다.
나는 조용히 말했다.
“유경아.”
“응?”
“너무 늦은 거 아니야?”
유경이는 내 가슴에 얼굴을 기대고 있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만 더 이렇게 있을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유경이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유경이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가로등 불빛이 비친 동그란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유경이를 더 꼭 안아주었다.

유경이도 아무 말 없이 내 품에 안겨 있었다.
광화문의 조용한 새벽.
주차장에 세워진 차 안.
처음 일본 회사 프로젝트에서 만나 함께 일했던 두 학생.
유경이와 나는 그렇게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른 채 서로의 온기를 느끼고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 우리 둘만 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 새벽은,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을 추억으로 마음속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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