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 앞에 동아리 후배가 애플 컴퓨터를 활용한 디자인 학원을 개업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여러 번 놀러 오라고 했지만 그동안 시간이 맞지 않았다. 이번에는 유경이와 함께 홍대 정문에서 만나 직접 가보기로 했다.
그날의 홍대 앞은 젊음으로 가득했다. 거리에는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사람도 있었고, 미술학원에서 나온 학생들이 커다란 화판을 들고 걸어 다녔다. 어디선가 커피 볶는 향이 바람을 타고 흘러왔고, 골목마다 작은 카페와 음반 가게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처럼 화려한 프랜차이즈 거리가 아니라 개성 있는 작은 가게들이 홍대를 채우던 시절이었다.
후배의 디자인 학원은 홍대 정문 바로 건너편 2층에 있었다. 간판은 크지 않았지만 깔끔했고, 계단을 올라가자 특유의 새 컴퓨터 냄새와 잉크 냄새가 섞여 흘러나왔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후배가 반갑게 뛰어나왔다.

“형! 드디어 왔네요. 형 얼굴 보기 너무 힘들어요.“
후배는 대학 시절과 하나도 변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언제나 호기심이 많고 새로운 것을 좋아하던 친구였다.
그는 전기공학과를 졸업했지만 전공보다 컴퓨터 그래픽에 더 큰 매력을 느꼈다. 학교에서도 틈만 나면 맥킨토시를 만지고, 새로운 프로그램이 나오면 누구보다 먼저 사용해 보곤 했다. 미술을 전공한 것은 아니었지만 감각은 꽤 뛰어났다. 공대생 특유의 논리적인 사고와 디자인 감각이 묘하게 잘 어우러져 있었다.
물론 미대 학생들처럼 데생을 오래 배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컴퓨터 그래픽이라는 새로운 분야에서는 누구보다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컴퓨터 그래픽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미대 학생들조차 쉽게 접하기 어려운 분야였고, 맥킨토시 컴퓨터는 말 그대로 꿈의 컴퓨터였다. 학교 컴퓨터실에도 거의 없었고, 한 대 가격이 웬만한 중고차 값과 맞먹을 정도였다. 포토샵과 일러스트레이터를 자유롭게 다루는 사람은 더욱 드물었다.
학원은 크지 않았다.
20평 남짓한 공간에 책상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벽 한쪽에는 대략 열 대 정도의 맥킨토시가 나란히 설치되어 있었다. 투명한 느낌의 디자인과 커다란 모니터는 그 자체만으로도 미래를 보는 듯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학생들은 조용히 화면을 바라보며 작업하고 있었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와 마우스 클릭 소리만이 잔잔하게 들렸다.
유경이는 학원에 들어오자마자 자연스럽게 컴퓨터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사실 유경이는 맥을 처음 보는 사람이 아니었다.
예전에 나와 함께 광화문 사거리의 애플 센터를 여러 번 방문했었다. 새로운 맥이 들어오면 함께 구경했고, 직원들이 시연하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곤 했다.
그래서인지 다른 사람들보다 맥 인터페이스가 전혀 낯설지 않았다.
유경이는 누가 특별히 가르쳐 준 적이 없는데도 금방 익힌다는 점이었다. 포토샵도, 일러스트레이터도 한두 번만 설명해 주면 금세 따라 했다. 메뉴를 외우는 것이 아니라 기능을 이해하는 듯했다.
후배가 웃으며 말했다.
“형수님, 잠깐 이것 좀 해보실래요?”
유경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마우스를 잡았다.

사진을 불러오더니 레이어를 만들고 색을 보정하고, 간단한 로고를 그려 넣었다. 처음 보는 학생들이 하나둘 작업을 멈추고 화면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후배도 놀란 표정이었다.
“아니….”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더니 크게 웃었다.
“형, 미대 2학년 형수님이 이 정도면 우리 학원 문 닫아야 하는 거 아니야?”
학원 안이 웃음바다가 되었다.

유경이는 쑥스러운 듯 웃으며 마우스를 내려놓았다.
“아니에요. 그냥 조금 만져본 거예요.”
그 말에 모두가 다시 웃었다.
후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조금 만져본 사람이 저렇게 하면 우리 학생들은 어떡해.”
잠시 웃음이 가라앉자 후배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형은 삼성에서 오라고 해도 사업한다고 안 갔잖아. 그러더니 대학원에 입학하더라.”
유경이는 그 말을 듣고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 잠깐 옛날 이야기를 하나 해보자.
지금은 삼성과 LG가 대학생들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기업 가운데 하나지만, 나 때는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물론 대기업이면 좋은 직장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무조건 가고 싶어 하는 꿈의 직장은 아니었다.
오히려 한국통신(KT)이나 한국전력 같은 공기업, 방송국, 정부출연연구소같은 곳을 선호 했다.
“삼성 갔어?”
“그래? 잘갔네.”
딱 그 정도의 반응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기업의 위상도, 청년들의 꿈도 많이 달라졌다. 시대가 변한 것이다.
후배가 다시 물었다.
“형, 사업은 언제 할 거야?”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우선 공부 좀 더하고.”
“아니, 아직도 공부?”
“응.”
후배가 고개를 갸웃했다.
“형은 전자공학이 그렇게 좋아?”
나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말했다.
“응. 나는 너무 행복해.”
후배는 말없이 나를 바라봤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탐험하는 것 같아.”
전자회로를 설계하고, 신호를 분석하고,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전자들의 움직임을 이해하는 과정.
그것은 내게 일이 아니라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거 같았다.
하나를 이해하면 또 다른 궁금증이 생겼고, 그 궁금증을 풀면 또 새로운 세상이 나타났다.
그래서 전자공학이 재미있었다.
유경이는 우리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
가끔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살며시 잡으며 학원 안을 둘러보았다.
컴퓨터 화면 하나하나를 유심히 바라보고, 학생들이 작업하는 모습도 관심 있게 지켜봤다.
오늘의 유경이는 평소보다 조금 더 어른스러워 보였다.
후배보다 나이가 더 많아서였을까.
아니면 처음 보는 공간에서도 차분하게 사람들을 배려하는 모습 때문이었을까.
괜히 마음이 편안해졌다.
시간은 어느새 한 시간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유경이와 나는 학원을 나왔다.
후배는 다음에 꼭 다시 오라며 우리를 배웅했다.
계단을 내려와 홍대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초여름의 바람이 골목 사이를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거리에는 젊은 예술가들이 그림을 팔고 있었고, 버스킹 음악이 멀리서 들려왔다.
우리는 말없이 한동안 걸었다.
그러다 골목 안쪽으로 난 좁은 계단을 따라 반지하 재즈카페로 내려갔다.
문을 여는 순간 은은한 색소폰 연주가 흘러나왔다.
조명은 어둡고 따뜻했고, 나무 테이블에서는 오래된 원두 향과 LP 특유의 아날로그 감성이 함께 느껴졌다.

https://youtu.be/OOO4ROO_sPM?si=xHSsdWswVAnY8XHa
창문은 지면보다 낮아 사람들의 발걸음만 보였다.
홍대의 분주한 거리와는 전혀 다른 시간이 그곳에는 흐르고 있었다.
유경이는 조용히 창가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내려다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나는 커피를 주문했고, 유경이는 따뜻한 허브티를 골랐다.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재즈 선율만이 공간을 채웠다.
서로의 하루를 천천히 정리해 주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오늘 후배의 학원에서 본 맥킨토시 컴퓨터들은 분명 시대의 최첨단 기술이었다.
하지만 내 기억에 오래 남은 것은 컴퓨터가 아니었다.
내 옆에서 조용히 내 손을 잡아 주던 유경이의 따뜻한 손과, 말없이 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미소 짓던 그 순간이었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사람은 결국 기술보다 사람을 기억한다는 것을, 그날 홍대의 작은 재즈카페에서 다시 한번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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