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유경이와 종묘에 가기로 했다. 종로3가역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먼저 도착한 나는 역사 밖으로 나와 유경이를 기다렸다. 잠시 후 유경이가 환하게 웃으며 걸어왔다.
“많이 기다렸어?”
“아니, 나도 방금 왔어.”

우리는 종묘 입구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구입하고 안으로 들어서자 도심의 소음은 어느새 멀어지고, 오래된 나무들이 만들어 내는 조용한 풍경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종묘는 언제 와도 마음이 차분해지는 곳이었다.
넓은 흙길을 따라 걸으며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유경이는 오래된 소나무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여긴 이상하게 시간이 천천히 가는 것 같아.”
“그러게. 서울 한복판인데도 다른 세상 같네.”
우리는 정전 앞 넓은 마당도 둘러보고, 나무 그늘 아래를 천천히 걸었다. 특별한 계획도 없었고, 어디를 꼭 가야 한다는 목적도 없었다. 그저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다.
한참을 걷다 벤치 하나가 보였다.
“유경아, 여기 잠깐 앉아 있어.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응.”

유경이는 벤치에 앉아 입구에서 받아 온 종묘 안내 책자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오래된 건물에 대한 설명을 읽다가 가끔 주변 풍경을 둘러보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소변을 보다가 그만 바지 앞부분에 소변이 조금 튀고 말았다.
“아…”
하필이면 여름용 얇은 바지였다. 아주 조금 묻었을 뿐인데도 얼룩이 눈에 띄었다. 잠시 그대로 서서 바지가 마르기를 기다릴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았다.
그때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손을 씻은 뒤 손에 묻은 물을 바지 앞쪽에 몇 번 자연스럽게 튀겼다. 마치 세면대에서 물이 튄 것처럼 보이게 만든 것이다. 얼룩도 자연스럽게 퍼졌다.
거울 앞에 서서 확인해 보니 꽤 그럴듯했다.
‘완벽한데?’
혼자 속으로 만족하며 피식 웃었다.
‘이 정도면 아무도 모르겠지.’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당당하게 화장실을 나왔다.
유경이는 안내 책자를 읽다가 내가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내 얼굴보다 먼저 바지를 본 모양이었다.
나를 보자마자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너 바지에 오줌 쌌지!”
나는 순간 당황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야. 손 씻다가 물이 튄 거야.”
유경이는 웃음을 겨우 참으며 말했다.
“아~ 그랬구나.”

하지만 말은 그렇게 했어도 표정은 전혀 믿지 않는 얼굴이었다.
우리는 다시 종묘를 걸었다.
조금 걷다가 유경이가 또 웃었다.
“왜 또 웃어?”
“아니… 바지만 보면 자꾸 생각나.”
“진짜 손 씻다가 물 튄 거라니까.”
“응, 알겠어.”
그렇게 대답했지만 웃음은 전혀 멈추지 않았다.
조금 더 걷다가도 내 바지를 한번 바라보고 웃고, 이야기를 하다가도 문득 생각난 듯 웃었다.

“미안해. 근대 너무 웃겨.”
나도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이제 그만 웃어.”
“안 돼. 오늘은 계속 생각날 것 같아.”
시간이 지나면서 바지는 조금씩 말라 갔다.
얼룩이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는데도 유경이는 내 바지만 보면 또 웃었다.
“이제 다 말랐잖아.”
“그래도 이미 늦었어.”
“뭐가?”
“오늘은 종묘보다 네 바지가 더 기억에 남을 것 같아.”
그 말에 나도 크게 웃었다.
우리는 종묘를 한 바퀴 모두 둘러보고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이제 저녁 먹으러 갈까?”
“좋아.”
우리는 대학로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종로 거리를 천천히 걸으며 공연 포스터를 구경하기도 하고, 서점 앞에 잠시 멈춰 서기도 했다. 당시에는 휴대전화도 없던 시절이라 약속 장소에서 만나면 하루 종일 서로에게 집중했다. 길을 걸으며 보이는 풍경을 이야기하고, 마음에 드는 가게가 있으면 그냥 들어가 보고, 발길 닿는 대로 걷는 것이 우리의 데이트였다.
대학로에 도착할 무렵에도 유경이는 또 한 번 내 바지를 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또 왜?”
“아니… 생각만 하면 웃겨.”
“그 얘기는 이제 그만.”
“평생 놀릴 거야.”
나는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손 씻다가 물이 튄 거라니까.”
“응, 알겠어.”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경이는 또 웃었다.
나도 결국 따라 웃었다.
돌이켜 보면 종묘에서 본 오래된 전각이나 아름다운 풍경보다 더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그날 유경이의 웃음이다.
소변이 조금 튄 바지를 감추려고 나름대로 머리를 굴렸던 나와, 그것을 한눈에 알아차리고 한참 동안 웃음을 멈추지 못했던 유경이.
남들이 들으면 별것 아닌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추억이 되었다.
특별한 계획도, 거창한 이벤트도 없었다. 함께 걷고, 함께 웃고, 사소한 실수 하나마저 즐거운 이야기로 만들어 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그날 새삼 느꼈다.
지금도 종묘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오래된 건물이 아니다.
나를 보자마자 손가락으로 바지를 가리키며 “너 바지에 오줌 쌌지!“라고 말한 뒤, 하루 종일 웃음을 참지 못했던 유경이의 해맑은 미소다. 그 웃음 덕분에 평범했던 하루는 평생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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