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유경이와 저녁 일곱 시에 광화문에서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유경이는 대학 3학년이 되었다.
우리가 사귄 지 3년이 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퇴근 시간이 막 지나 사람들이 하나둘 광장을 지나고 있었다. 한여름이었지만 해가 서쪽으로 기울면서 낮의 뜨거웠던 열기는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광화문 광장에는 산책을 나온 사람들과 약속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먼저 도착해 벤치에 앉아 있었다.
잠시 후 멀리서 유경이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밝게 웃으며 다가온 유경이는 내 옆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우리는 한동안 특별한 주제 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끔은 서로 아무 말 없이 광장을 바라보기도 했지만 어색하지 않았다.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편안한 시간이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
“유경아 드라이브 갈까?”
유경이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는 차에 올라 광화문을 출발했다.
특별히 목적지를 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조금 더 함께 있고 싶었다.
차는 종로를 지나 동대문으로 향했다.

창밖으로는 저녁 불빛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고, 도심은 낮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동대문을 지나 고려대학교 앞을 지날 때쯤 차 안에는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유경이는 창문 밖을 바라보다가 가끔 생각나는 이야기를 꺼냈고, 나는 운전을 하며 대답했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수유를 지나 의정부로 들어서자 도심의 복잡함은 조금씩 사라졌다.
도로는 한산해졌고, 창문을 조금 내리자 여름밤의 공기가 차 안으로 스며들었다.
낮에는 무더웠지만 저녁이 되자 공기는 의외로 선선했다.
양주를 지나 차의대를 지나칠 무렵에는 주변 풍경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높은 건물 대신 어둑한 산과 가로등이 이어졌고, 차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표지판에 대진대학 이라고 써있었다
우리는 근처에 차를 세웠다.
“유경아 조금 걸을까?”
유경이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천천히 길을 걸었다.
사실 나도 이곳은 처음이었다.
특별한 관광지가 있는 곳도 아니었고, 일부러 찾아올 만큼 유명한 장소도 아니었다.
그저 드라이브를 하다 우연히 멈춰 선 곳이었다.
그래서 더 좋았다.
사람도 거의 없었고, 자동차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가로등 불빛 아래로 조용한 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여름이었지만 저녁이라 그런지 공기가 선선했다.
가끔 불어오는 바람이 하루의 더위를 식혀 주었다.
유경이는 두 손을 뒤로 모은 채 천천히 걸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머리카락이 살짝 흩날렸다.

우리는 특별한 말 없이 같은 속도로 걸었다.
그 조용한 시간이 오히려 더 편안했다.
얼마쯤 걸었을까.
유경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 졸업하면 유학 가고 싶어.”
나는 걸음을 늦추며 물었다.
유경이는 처음 만났을 때에도 유학 이야기를 했었다.
“어디로?”
“아직 정한 건 아니야. 프랑스일 수도 있고, 미국일 수도 있고, 일본일 수도 있고…. 그런데.”

잠시 말을 멈춘 유경이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혼자 가고 싶지는 않아.”
아주 자연스럽게 말했다.
“너랑 같이 가고 싶어.”
“우리 결혼해서 같이 가자.”
그 말은 장난처럼 들리지 않았다.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미래를 조심스럽게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내 마음속에도 쉽게 정리되지 않는 고민이 있었다.
한국에서 석사 과정을 마친 뒤 박사 과정까지 계속 이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특히 지도교수님과 함께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석사 과정만으로 끝나는 연구가 아니었다.
박사 과정까지 이어져야 제대로 마무리할 수 있는 연구였고, 교수님 역시 내가 계속 함께하기를 기대하고 계셨다.
나 역시 그 연구에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유경이와 함께 새로운 나라에서 공부하며 살아가는 미래도 충분히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두 가지 길이 모두 소중했기에 어느 하나를 쉽게 선택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그런 고민을 이야기하지 못했다.
유경이는 기대에 찬 표정으로 미래를 이야기하고 있었고, 나는 그 마음을 바로 흔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유경이도 나를 바라보며 내손을 꽉 잡고
더가까이 다가 오면서 내옆을 걸었다.

잠시 후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굳이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이였다.
조금 더 걷다 보니 둘 다 배가 고파졌다.
근처를 둘러보니 아직 문을 연 작은 식당 하나가 보였다.
우리는 그곳으로 들어갔다.
늦은 시간이어서 손님은 거의 없었다.

조용한 식당 이었다. 창밖으로는 여름밤이 천천히 깊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간단한 저녁을 주문했다.
음식이 나오자 자연스럽게 젓가락을 들었다.
드라이브를 하며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다시 이어 갔다.
연구실 이야기, 학교 이야기, 유학 이야기,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고 싶은 삶에 대한 이야기까지.
대화는 끊기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뒤 따뜻한 차를 마시며 잠시 더 앉아 있었다.
창밖은 어느새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돌아갈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을 마친 뒤 다시 차에 올랐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은 갈 때보다 훨씬 조용했다.

라디오에서는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왔고, 유경이는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가로등 불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 역시 운전을 하며 조금 전 나누었던 대화를 계속 떠올리고 있었다.
유경이가 말했던 “우리 결혼해서 같이 유학 가자.” 라는 한마디는 그날 밤이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그날은 특별한 여행도, 거창한 계획도 없었다.
광화문에서 만나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목적지 없이 드라이브를 하고, 대진대학교 앞의 조용한 길을 함께 걷고, 작은 식당에서 저녁을 먹은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지금도 그날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화려한 풍경이 아니라, 여름밤의 선선한 바람과 미래를 함께 이야기하던 유경이의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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