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경이는 한 번도 먼저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다소 무리한 말을 하거나 감정적으로 이야기할 때도 유경이는 끝까지 내 말을 들으려고 했다. 내 말이 틀렸다고 몰아붙이기보다는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이해하려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배려였다.
관계를 이기고 지는 문제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감정을 앞세운 것은 나였다. 내 생각을 너무 강하게 이야기할 때도 있었고, 고집을 부릴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유경이는 나를 이해시키려고 노력했다.
반대로 유경이가 속상하거나 화가 난 것 같으면 이번에는 내가 유경이를 이해시키려고 했다.
크게 싸우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서로의 의견이 부딪히고 마음이 상하면 며칠 몇달씩 연락을 하지 않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그 시절에는 휴대전화가 없었다.
연락을 하려면 집으로 전화를 걸거나 공중전화를 이용해야 했다. 삐삐가 있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언제든지 바로 연락할 수 있는 시대는 아니었다.
그래서 연락이 끊기면 정말 소식이 끊기는 것이었다.
며칠 동안 아무 연락이 없으면 괜히 마음이 무거워졌다.
‘내가 먼저 전화할까.’
수화기를 들었다가도 다시 내려놓곤 했다.
혹시 유경이 어머님이 전화를 받으면 어쩌나.
아직 화가 풀리지 않았으면 더 어색해지는 건 아닐까.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렇게 망설이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먼저 연락해 오는 사람은 유경이였다.
집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야.”
그 한마디에 며칠 동안 마음속에 있던 답답함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았다.
“뭐 해?”
“TV 보고 있었지.”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유경이가 말했다.
“잠깐 나올 수 있어?”
“어디야?”
“우리 집 근처.”
“조금만 기다려. 금방 갈게.”
“응.”
짧은 대화였지만 그 몇 마디면 충분했다.
나는 서둘러 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유경이 집 근처 골목으로 향했다.
공중전화 부스 앞에는 유경이가 조용히 서 있었다.
방금 전까지 수화기를 들고 있었는지 손에는 동전 몇 개가 쥐어져 있었다.
나를 보자 유경이가 미소를 지었다.
나도 웃으며 다가갔다.
며칠 동안 연락이 없었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평소와 다르지 않은 표정이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잠시 나란히 걸었다.
유경이 집은 여대 근처에 있었다.
그 주변 에는 작고 예쁜 카페가 몇 군데 있었다.
요즘처럼 프랜차이즈 카페가 많던 시절은 아니었다.
아담한 개인 카페들이 자리 잡고 있었고, 창문 너머로 따뜻한 조명이 새어 나왔다.
우리는 그중 자주 가던 카페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 갓 내린 커피 향이 은은하게 퍼졌고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창가 자리에 마주 앉아 커피를 주문했다.

커피가 나오기 전까지 우리는 특별한 말을 하지 않았다.
그냥 서로를 바라보다가 가끔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나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유경이를 가만히 바라봤다.
평소처럼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며칠 동안 나 때문에 마음을 많이 썼던 것처럼 보였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유경이였다.
나를 바라보며 살짝 웃더니 말했다.
“잘 지냈던 것 같네.”
평범한 말이었지만 그 안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잘 지냈냐는 말.
이제 괜찮냐는 말.
그리고 우리, 예전처럼 지내자는 말.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럭저럭.”
유경이도 웃었다.
“나도.”
우리는 굳이 지난 일을 길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누가 잘못했는지 따지지도 않았다.
이미 서로가 충분히 마음을 쓰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대학원에서 지내는 이야기를 했다.
연구실에서 밤늦게까지 실험을 하는 일, 지도교수님과 연구 방향을 놓고 토론했던 일, 논문 준비로 바쁘게 지내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유경이는 실기 수업과 과제 때문에 화실에서 늦게까지 그림을 그리던 이야기, 전시를 준비하며 밤을 새웠던 일, 교수님의 지도를 받으며 고민했던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유경이는 내가 들려주는 과학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어 주었고, 나는 유경이가 들려주는 미술 이야기를 들으며 재미있게 웃었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서로의 미래 이야기, 음악 이야기, 앞으로 함께 가 보고 싶은 미술 전시회 이야기.
서로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며칠 동안 마음속에 남아 있던 서운함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창밖은 어느새 어둑해지고 있었다.
카페 안에는 따뜻한 조명이 켜졌고, 커피 향은 여전히 은은하게 퍼져 있었다.
유경이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미소를 지었다.
의견이 달라 다투기도 했고, 며칠씩 연락을 하지 않는 날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다시 만나 같은 자리에 앉아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누가 먼저 잘못했다고 따질 필요도 없었고, 거창한 사과도 필요하지 않았다.
서로를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 하나면 충분했다.
카페를 나와 여대 앞 골목을 천천히 걸었다.

초여름 저녁바람이 불어왔고, 가로등 불빛이 하나둘 골목을 밝히기 시작했다.
우리는 특별한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편안했다.
가끔 눈이 마주치면 웃었고,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었다.
지금도 그날을 떠올리면 기억에 남는 것은 다툼이 아니다.
며칠 동안 서로를 걱정하며 연락을 망설였던 시간, 집 근처 공중전화에서 동전을 넣고 내게 전화를 걸었던 유경이, 그리고 여대 근처 작은 카페에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마주 앉아 웃고 있던 그 모습이다.
돌이켜보면 의견이 다르면 서로를 이해하려 했고, 서운함은 있었지만 관계를 포기하지 않았으며, 자존심보다 서로를 잃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아마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다시 마주 앉을 수 있었던 것 같다.
'CanvasMe-Once Upon Love'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호수같은 눈을 가진 친구 (0) | 2026.07.04 |
|---|---|
| 종묘에서 웃음이 멈추지 않았던 하루 (1) | 2026.07.03 |
| 명동 음악카페 (0) | 2026.07.02 |
| 동아리 후배의 애플 디자인센터 (1) | 2026.07.01 |
| 여름밤의 드라이브 (0) | 2026.06.27 |
| 광화문의 점심 (0) | 2026.06.25 |
| 광화문의 새벽 (0) | 2026.06.24 |
| 논현동 중국성에서 보낸 특별한 하루 (0) | 2026.06.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