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경이는 내가 화를 내려는 기색만 보여도 이상하리만큼 먼저 알아차렸다. 목소리가 조금 낮아지거나 표정이 굳어지는 순간이면, 마치 오래전부터 약속이라도 한 사람처럼 내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얼굴을 내 얼굴 가까이 가져왔다.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동그란 눈으로 내 눈을 가만히 바라보곤 했다.
처음에는 왜 그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무슨 변명을 하려는 것도 아니었고, 잘못을 인정하며 사과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조용히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 짧은 순간이 지나면 내 마음속에 피어오르던 화는 조금씩 힘을 잃었다.
유경이의 눈은 참 맑았다. 계산도 없었고, 억울함도 없었으며, 상대를 이기려는 마음도 없었다. 그 눈빛에는 오직 ’미안하면 미안한 대로, 아니면 아닌 대로 당신 이야기를 들을게.’라는 따뜻함만 담겨 있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큰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사람은 화가 나면 상대를 보지 않으려 한다. 시선을 피하거나, 다른 곳을 바라보며 감정을 키운다. 그런데 유경이는 정반대였다. 내가 자신을 외면하지 못하도록 내 시선을 붙잡았다. 눈을 마주치는 순간, 화를 내기 위해 준비했던 말들이 머릿속에서 하나둘 사라졌다.
“왜 그래?”
그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미안해.”
그 말조차 먼저 하지 않았다.

그저 웃음기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마치 “너 화난 것도 이해해. 하지만 우리, 싸우지는 말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신기한 것은 그럴 때마다 결국 먼저 웃는 사람은 나였다는 것이다. 입술을 꾹 다물고 화를 유지하려고 애써도, 유경이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입꼬리가 조금씩 올라갔다. 그러면 유경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씨익 웃었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화는 완전히 사라졌다.
“참…”
나도 모르게 한숨 같은 웃음이 나왔다.
“너는 정말…”
끝까지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유경이는 자신의 귀여움을 이용하려고 했던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행동이 자연스러웠다. 싸우는 것이 싫어서, 서로 마음이 멀어지는 것이 싫어서, 가장 먼저 다가오는 사람이었다.
생각해 보면 사랑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값비싼 선물이나 화려한 이벤트보다도, 상대가 화났을 때 먼저 다가와 눈을 바라봐 주는 용기였다. 자존심을 조금 내려놓고 먼저 손을 내미는 마음이었다.
유경이는 그런 사람이었다.
우리는 특별히 싸움이 많은 커플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 사는 일이 그렇듯 작은 오해도 있었고, 서로 피곤한 날에는 예민해질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유경이는 같은 방법을 썼다. 내 앞에 와서 얼굴을 가까이 대고 눈을 바라보는 것.
가끔은 너무 가까워서 나도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그러면 유경이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화 풀릴 때까지.”
그 짧은 대답 하나에 웃음이 터졌다.
정말 이상했다. 세상 누구에게도 쉽게 풀리지 않던 내 고집이 유경이 앞에서는 힘을 쓰지 못했다. 친구들과 다툴 때는 며칠이고 말을 안 할 수도 있었고, 직장에서 억울한 일을 겪으면 오래 마음에 담아두는 성격이었다. 그런데 유경이에게만큼은 그러지 못했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유경이는 나를 이기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가 맞고 틀렸는지를 따지기보다, 먼저 우리 사이의 분위기를 회복하려 했다. 그 마음을 알고 있었기에 나도 더 이상 화를 붙잡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사람들은 사랑을 오래 유지하는 비결을 묻곤 한다. 특별한 비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돌이켜보면 우리의 답은 아주 단순했다.
먼저 웃어 주는 사람.
먼저 다가와 주는 사람.
먼저 눈을 맞춰 주는 사람.
유경이는 늘 그런 사람이었다.

시간이 흐른 지금도 그 장면은 선명하게 기억난다. 화를 내려고 굳은 표정을 짓고 있던 내 앞에 유경이가 슬며시 다가오던 모습. 머리카락이 살짝 흔들리고, 커다란 눈으로 내 눈을 올려다보며 말없이 미소 짓던 얼굴.
그 모습을 보면 화를 계속 낸다는 것은 마치 봄날의 따뜻한 햇살을 향해 끝까지 등을 돌리고 있는 것처럼 어리석게 느껴졌다.
결국 나는 웃었다.
그리고 유경이도 웃었다.
우리는 그렇게 별것 아닌 다툼을 끝냈다.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그때 유경이가 다른 사람들처럼 목소리를 높이며 따지고 들었다면, 우리의 기억은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경이는 늘 사랑을 선택했다. 다툼보다 화해를, 자존심보다 서로를 선택했다.
그래서 나는 끝내 화를 낼 수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사랑스러운 사람에게 화를 낸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 눈빛 하나면 충분했다. 그 미소 하나면 충분했다. 세상을 향한 모든 피로와 짜증은 남아 있을지 몰라도, 유경이를 향한 화만큼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조용히 녹아내렸다. 그리고 나는 매번 같은 생각을 했다.
‘이 사람과 함께라면, 어떤 다툼도 오래가지 않겠구나.’
그것은 사랑을 표현하는 유경이만의 방식이었고, 내가 평생 잊지 못할 가장 따뜻한 기억 중 하나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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