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경이가 남대문에 미술도구를 사러 가자고 해서 함께 길을 나섰다. 오래된 상점들이 빼곡히 들어선 골목을 천천히 걸으며 미술 재료를 구경했다. 유경이는 연필을 하나하나 손에 들어보며 심의 느낌을 확인했고, 유화용 붓도 모의 탄력과 손잡이의 길이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렇게 마음에 드는 미술용 연필과 유화용 붓 몇 자루를 고른 뒤 우리는 남대문을 나와 명동 쪽으로 걸어갔다.
계절이 언제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날 명동 거리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거리에는 음악과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리는 한 음악감상실 겸 카페에 들어갔다. 내부는 작은 칸막이로 좌석이 나뉘어 있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크게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었다.
유경이는 DJ에게 비틀즈 노래를 신청했다. 잠시 후 익숙한 멜로디가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아 조용히 음악을 들었다.
은은한 조명이 유경이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그 빛 아래에서 바라본 유경이는 정말 아름다웠다. 맑은 눈, 오뚝한 코, 부드럽게 이어지는 턱선, 작고 예쁜 귓볼, 그리고 목선을 따라 흐르던 고운 실루엣까지. 화려하게 꾸민 모습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모습 그대로였지만, 그 순간의 유경이는 내 기억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으로 남아 있다.
노래가 계속 흐르던 어느 순간, 유경이는 조용히 내 옆으로 더 가까이 다가와 내 가슴에 얼굴을 기댔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음악을 들으며 눈을 감고 있었다.
나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이 순간이 깨질까 봐.
시간이라는 것이 정말 멈출 수 있다면 바로 지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세상은 계속 흘러가고 있었지만, 내 마음만은 그 조용한 음악감상실 한가운데 멈춰 서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유경이가 살며시 고개를 들며 물었다.

“무슨 생각해?”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이렇게 천사 같은 친구를 내 곁에 있게 해주셔서 고맙다고 생각했지. 하하.”
유경이는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천사야? 하하하.”
그리고 잠시 뒤, 유경이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나님. 이렇게 멋진 친구를 사랑할수 있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장난스럽게 한 말이었지만, 그 한마디는 이상할 만큼 오래 마음에 남았다.

유경이는 가끔 이런 예쁜 말을 아무렇지 않게 건네곤 한다. 상대를 기분 좋게 만드는 말,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말을 참 자연스럽게 한다. 그래서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웃음이 많아진다.
https://youtu.be/Mki34tyoCp0?si=utBMRUoU4HuVJF0g
All You Need Is Love (Live from Abbey Road Studios, June 25th, 1967)
The Beatles perform “All You Need Is Love” live for Our World — Jun...
www.youtube.com
반대로 나는 그런 표현이 서툰 사람이다. 마음속에는 늘 고마움과 애정이 가득하지만 막상 입 밖으로 꺼내려 하면 괜히 쑥스럽고 어색해진다. 그래서 가끔은 유경이가 좋아할 만한 말을 해주려고 애써 보지만, 유경이처럼 상대의 마음을 깊이 울리는 말을 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어쩌면 사람마다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 다른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따뜻한 말로 마음을 전하고, 누군가는 행동으로 마음을 보여준다. 나는 후자에 조금 더 가까운 사람이다. 말은 서툴지만 함께 시간을 보내고, 필요할 때 곁에 있어 주고, 조용히 바라봐 주는 것이 내 방식이었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깨달았다.
따뜻한 말 한마디는 오래 기억된다는 것을.
비틀즈의 노래는 언젠가 끝났고 우리는 카페를 나왔다. 명동의 밤거리는 여전히 밝았고 사람들은 바쁘게 걸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는 음악보다도 유경이가 했던 한마디가 계속 맴돌았다.
“이렇게 멋진 친구를 사랑할수 있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마 유경이는 그 말을 금방 잊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사람은 평생 수많은 말을 듣고 살아간다. 그중 대부분은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지지만, 어떤 말은 오랫동안 마음속에 남아 삶의 한 장면이 된다.
그날 명동의 조용한 음악감상실, 은은한 조명 아래 내 어깨에 기대어 비틀즈를 듣던 유경이의 모습은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내 기억 속에서 조금도 바래지 않을 것이다. 그날의 음악과 공기, 그리고 따뜻했던 그 순간은 지금도 내 마음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잡담>
여자친구를 만날 때마다 꼼꼼하게 계획을 세우는 사람들도 있다. 어디를 갈지,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할지 미리 정해 놓고 만나는 것이다. 하지만 유경이와 나는 언제나 특별한 계획이 없었다.
“컴퓨터 보러 갈까?”
“나 미술용품 사러 가야 하는데 같이 가자.”
“점심 먹자.”
약속은 늘 이 정도였다. 특별한 목적도, 거창한 일정도 없었다. 그저 만나고 싶으면 만나고, 걷고 싶으면 함께 걷고, 차 한잔 마시고 싶으면 카페에 들어갔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주변 친구들을 보면 만날 때마다 계획을 빼곡하게 세우곤 했다. 그런데 정작 만나고 나면 “너무 피곤하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물론 그런 만남도 즐거웠겠지만, 우리에게는 그런 방식이 어울리지 않았다.
유경이와 나는 계획보다 마음이 먼저였다. 보고 싶으면 만나고, 바쁘면 다음에 만나면 됐다. 서로 시간이 나면 그때 바로 약속을 잡았다. 특별한 규칙도, 부담도 없었다. 그래서 더 오래 편안하게 함께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유경이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까. 그 이야기를 직접 물어본 적은 없다. 하지만 함께 보낸 시간들을 돌아보면,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요즘은 휴대전화가 있어 언제든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집으로 전화를 걸거나 삐삐(BB)를 이용하는 것이 전부였기에 자주 연락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한 번의 만남이 지금보다 더 소중했고, 함께 걷고 함께 웃었던 평범한 시간들이 오래도록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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