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저녁, 유경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미안해. 전시회 준비가 길어져서 조금 늦을 것 같아.”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평소보다 힘이 없었다. 나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졌다. 전시회를 앞두고 몇 주째 밤낮없이 작업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밤 9시에 세종문화회관 뒤편에서 만나기로 했다.
초여름 밤공기는 조금 눅눅했고, 광화문의 불빛은 유난히 밝았다. 나는 약속 장소 근처에 차를 세워 두고 유경이를 기다렸다. 시계를 몇 번이나 들여다보았지만 이상하게 초조하지는 않았다. 그저 빨리 얼굴을 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9시 40분쯤.
멀리서 유경이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어깨에는 커다란 가방이 걸려 있었고, 한 손에는 미술 도구들이 담긴 짐이 들려 있었다. 평소에도 마른 편이었지만 그날은 유난히 야위어 보였다. 걸음도 힘겨워 보였다.
가로등 불빛 아래로 들어온 유경이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반가움보다 먼저 안쓰러움이 밀려왔다.
눈 밑에는 짙은 피로가 내려앉아 있었고, 웃으려고 노력하는 표정 속에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다가갔다.
그리고 조용히 유경이를 안아 주었다.
유경이는 잠시 놀란 듯했지만 곧 내 품에 기대어 왔다.
말이 필요 없었다.

그 순간 나는 오래전의 내 모습을 떠올렸다.
대학원에서 밤을 새우며 회로를 설계하던 시절.
전자공학이라는 세상에 완전히 빠져 살았던 시절.
며칠씩 집에도 제대로 들어가지 못하고 실험실에서 살다시피 하던 날들이 있었다. 회로가 동작하지 않으면 새벽까지 오실로스코프를 들여다보았고, 설계 오류를 찾기 위해 며칠을 밤새우기도 했다.
그때 나는 늘 생각했다.
‘누가 나를 조금만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왜 잠도 안 자고 매달리는지 누군가 알아줬으면 좋겠다.’
사람들은 결과만 보았다.
성공한 실험.
완성된 제품.
좋은 성과.
하지만 그 뒤에 있는 외로움과 고독은 아무도 몰랐다.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유경이의 얼굴이 바로 그때의 나처럼 보였다.
작품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 스스로를 갉아먹고 있는 사람의 얼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지만 너무 힘들어서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사람의 얼굴.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팠다.
나는 말없이 유경이 손에 들려 있던 짐을 받아 들었다.
“이거 내가 들게.”
“괜찮은데.”
“안 괜찮아.”
미술 도구 가방과 짐을 모두 내가 메었다.
유경이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차로 걸어가는 동안 유경이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손을 꼭 잡고 걸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차에 올라탄 후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시동을 걸면서 물었다.
“유경아.”
“응?”
“서울 떠나고 싶지?”
유경이는 창밖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응…”
“어디로 가고 싶어?”
“멀리는 말고.”
잠시 말을 멈춘 뒤 유경이가 덧붙였다.
“조용한 곳.”
그 말이 왜 그렇게 가슴을 아프게 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아무 말 없이 핸들을 돌렸다.
차는 광화문을 지나 강변북로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정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에는 이미 답이 있었다.
양수리.
서울에서 멀지 않지만 잠시 세상을 잊을 수 있는 곳.
창밖으로 한강의 야경이 스쳐 지나갔다.
유경이는 어느새 조용해졌다.
고개를 돌려 보니 조수석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
얼마나 피곤했던 걸까.
몇 분도 지나지 않아 깊은 잠에 빠진 모습이었다.
나는 차 속도를 조금 줄였다.
잠시 갓길에 차를 세웠다.
에어컨 바람이 차갑게 느껴졌다.
나는 조용히 슈트를 벗었다.
그리고 잠든 유경이 어깨 위에 덮어 주었다.

유경이는 잠결에 살짝 몸을 움츠렸다가 다시 편안한 표정으로 잠들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참 이상했다.
전시회를 준비하는 화가.
강하고 당찬 사람.
늘 웃는 사람.
그런 유경이가 그 순간만큼은 너무 작고 연약해 보였다.
마치 세상의 무게를 혼자 견디고 있는 사람 같았다.
나는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불쌍해서였을까.
안쓰러워서였을까.
아니면 사랑해서였을까.
잠든 사람의 얼굴을 보며 눈물이 날 것 같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어두운 강물 위로 달빛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조용한 음악이 흐르는 차 안.
유경이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양수리를 향해 달렸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양수리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늦은 밤이었지만 카페 주변은 생각보다 환했다.
차를 주차하자 유경이가 천천히 눈을 떴다.
잠에서 막 깨어난 얼굴이었다.
“다 왔어…?”
“응.”
“어디야?”
“양수리.”
유경이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살며시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편안한 미소였다.
우리는 카페로 들어갔다.
은은한 조명이 공간을 따뜻하게 비추고 있었다.
밤 11시가 가까운 시간이었지만 사람들은 꽤 많았다.
창가에는 연인들이 앉아 있었다.
커피 향과 잔잔한 음악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우리는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세상과 조금 떨어진 자리.
아무도 우리를 신경 쓰지 않는 자리.
유경이의 표정이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했다.
커피가 나오고 음악이 흐르는 동안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함께 있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잠시 후 유경이가 천천히 내 어깨에 기대었다.
따뜻한 체온이 전해졌다.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혹시라도 이 평온한 순간이 깨질까 봐.
스피커에서는 잔잔한 피아노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유경이는 눈을 감은 채 음악을 들었다.

그러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번 작품 말이야…”
그리고 자신이 작업하고 있는 작품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어떤 색을 사용했는지.
어떤 감정을 담고 싶은지.
왜 그 장면을 그리고 있는지.
나는 조용히 들었다.
조언도 하지 않았다.
평가도 하지 않았다.
그저 들었다.
아마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해결책이 아니라 들어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유경이는 이야기하는 동안 점점 생기를 되찾았다.
눈빛도 밝아졌다.
손짓도 커졌다.
방금 전까지 지쳐 보이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나는 그런 모습을 보며 미소 지었다.
사람은 참 신기하다.
사랑하는 사람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다시 힘을 얻는다.
그날 밤 양수리의 음악과 조명, 커피 향은 시간이 지나면 모두 잊혀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어깨에 기대어 작품 이야기를 하던 유경이의 목소리는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세상 누구도 유경이의 고단함을 알아주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오늘 밤만큼은.
그 무거운 짐을 함께 들어 주고 싶다고.
그녀가 지칠 때 기대어 쉴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양수리의 깊은 밤은 그렇게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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