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봄이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나는 대학원 선배가 운영하는 벤처기업에 들어가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다. 회사는 작지만 속도감이 있었고,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만큼 바쁘게 흘러갔다. 나는 아직 그 리듬에 완전히 익숙하지 않았다.
아침마다 출근길은 조금 낯설었고,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내 모습도 아직은 완전히 회사 사람 같지 않았다. 학생과 직장인 사이 어딘가에 걸쳐 있는 느낌이었다.

그 시기 여자친구는 미대 3학년이었다. 작업실과 학교를 오가며 늘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림과 과제, 전시 준비가 겹치던 시기라 잠도 부족한 날이 많았다.
우리는 서로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건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였다.
다만 어제는 잠깐 말이 엇갈리는 순간이 있었다. 특별한 사건이라기보다는 피로와 타이밍이 겹친 정도였다. 그날의 말들이 아주 조금 남아 있는 상태였다.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던 오후였다.
내 자리 직통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나 지금 대학로인데 잠깐 나올 수 있어?”
평소보다 조금 조용한 목소리였다.
나는 잠시 상황을 보고 말했다.
“지금 회사라서 바로는 어렵고… 7시쯤 보면 안 될까?”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그녀가 말했다.
“너 사랑이 식은 거 아니야?”
수화기 너머로 거리의 소리가 계속 흘러들어왔다. 사람들 말소리, 바람, 지나가는 차 소리. 그 사이로 그녀의 숨소리가 섞여 있었다.
"기다려“
회사에 특별한 일이 없어서, 회사에 반차를 내고 대학로로 향했다.
대학로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거리 공연, 사람들, 카페, 익숙한 골목.
우리가 자주 오던 장소였다.
약속한 카페 문을 열었을 때 그녀는 이미 와 있었다.
그리고 옆에는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가 함께 있었다.
나는 특별히 놀라지 않았다.
그저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세 사람은 창가 자리에 앉았다.
칵테일을 주문했다.

얼음이 잔 속에서 부딪히는 소리가 조용히 들렸다.
처음에는 약간의 어색함이 있었지만, 곧 대화가 이어졌다.
학교 이야기, 작업 이야기, 일상 이야기.
웃음도 몇 번 오갔다.
그녀는 생각보다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전화 속 목소리와 겹쳐지지 않는 얼굴이었다.
⸻
시간이 지나 그녀의 친구가 먼저 자리를 떠났다.
이제 남은 사람은 우리 둘이었다.
카페 밖으로 나오자 저녁이 내려오고 있었다.
대학로의 공기는 낮보다 조금 더 느리고 조용해져 있었다.
⸻
우리는 특별한 목적 없이 걸었다.
공연장 앞을 지나고, 골목을 돌고, 익숙한 길을 따라갔다.
말은 많지 않았다.
평소와 같이 손을 잡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그냥 걸었다.

내가 먼저 말했다.
“어제는 미안했어.”
그녀는 잠시 걷다가 말했다.
“나도.”
그 정도면 충분했다.
더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
골목이 좁아지면서 발걸음도 자연스럽게 느려졌다.
가로등 불빛이 길게 늘어져 있었고, 공기는 차갑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그녀의 집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말이 없었지만 흐름은 자연스러웠다.
따로 결정된 것도 아니고, 설명된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
집 앞 골목에 도착했다.
그녀가 걸음을 멈췄다.
“오늘 와줘서 고마워.”
나는 짧게 웃었다.
“응.”
잠시 서로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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