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여름이었다.
그날 여자친구는 보고 싶은 영화가 있다고 했다. 영화 제목은 「인디아나 존스와 최후의 성전」이었다. 당시에는 새로운 영화가 개봉하면 종로나 충무로의 극장가가 사람들로 북적였다. 영화 한 편을 보는 것도 하나의 큰 행사처럼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충무로에서 만나기로 했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나는 충무로역 근처를 천천히 걸었다. 거리에는 영화 간판들이 가득했고, 전봇대와 건물 벽에는 개봉 영화 포스터들이 붙어 있었다. 지금처럼 휴대폰으로 시간을 보내는 시대가 아니어서 사람들은 극장 앞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거나 포스터를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잠시 후 멀리서 여자친구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언제나처럼 손에는 커다란 가방이 들려 있었다.
“오래 기다렸어?”
여자친구가 웃으며 물었다.
“방금 왔어.”
사실은 조금 전에 도착했지만 괜히 그렇게 말했다.
우리는 극장으로 향했다. 매표소 앞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인기 영화였던 만큼 표를 사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다행히 원하는 시간대의 표를 구할 수 있었다.
표를 손에 쥐고 나니 영화가 시작되기까지 한 시간 정도 남아 있었다.
극장 로비에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고, 누군가는 음료수를 마시고 있었고 누군가는 영화 팸플릿을 읽고 있었다.
나는 빈 테이블을 찾아 자리에 앉았다.

여자친구는 내 옆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잠시 후 가방에서 익숙한 물건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도화지와 연필이었다. 도화지를 무릎 위에 올렸다.
그녀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마치 무엇인가를 찾는 사람처럼 시선을 움직였다.
그러다가 테이블 옆에 놓여 있던 물병 하나를 바라보았다.
극장에서 손님들이 마실 수 있도록 준비해 둔 평범한 물병이었다.
누가 보아도 특별할 것 없는 물건이었다.
그런데 여자친구는 그 물병을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곧바로 연필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각사각.
연필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옆에서 그녀의 손이 움직이는 모습을 나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손목은 부드럽게 움직였고 연필은 망설임이 없었다.
몇 번의 선이 지나가자 물병의 윤곽이 나타났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입체감이 생겼다.
빛이 닿는 부분과 그림자가 생기는 부분이 자연스럽게 표현되기 시작했다.
나는 신기한 마음으로 물었다.
“방금 본 건데 어떻게 그렇게 그려?”
여자친구는 연필을 움직인 채 대답했다.
“그냥 보이는 대로.”
하지만 내 눈에는 절대 그냥 보이는 대로가 아니었다.
나는 물병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그림을 보았다.
같은 물건인데 종이 위에 있는 그림이 더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유리의 투명함과 둥근 곡선, 빛이 반사되는 느낌까지 표현되어 있었다.
고작 몇 분 만에 그렸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나는 전자공학을 좋아했다.
회로를 보고 있으면 즐거웠고, 새로운 전자 부품을 보면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여자친구는 달랐다.
그녀는 세상을 그림으로 바라보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무심코 지나치는 물건도 그녀에게는 그림의 소재가 되었다.
커피잔 하나.
창문 하나.
가로등 하나.
심지어 길가에 떨어진 낙엽도 그녀는 오래 바라보곤 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종이 위에 옮겨 놓았다.
나는 그런 모습이 참 신기했다.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가 나와는 달랐다.
연필을 움직이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여자친구는 그림을 그릴 때 가장 행복해 보였다.
평소에도 밝은 사람이었지만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의 표정은 달랐다.

마치 자신만의 세계에 들어간 것처럼 편안해 보였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보여 주기 위해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좋아서 하는 것이었다.
그 표정을 보고 있으면 나도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서는 특별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그녀에게는 그것이 그림이었다.
잠시 후 극장 안으로 입장할 시간이 되었다.
여자친구는 연필을 내려놓고 그림을 바라보았다.
“다 그렸네.”
나는 도화지를 들여다보았다.
몇 분 전까지 평범한 물병이 있던 자리에는 생생한 스케치가 완성되어 있었다.
정말 잠깐의 시간이었는데도 입체감이 살아 있었다.
나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볼 때마다 신기하다.”

여자친구는 웃으며 그림을 가방에 넣었다.
“그 정도는 아니야.”
하지만 나에게는 충분히 신기했다.
우리는 표를 확인받고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객석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조명이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영화가 시작되었다.
스크린 속에서는 인디아나 존스의 모험이 펼쳐지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내 기억 속에 가장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은 영화 장면이 아니었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로비에서 보았던 여자친구의 모습이었다.
도화지를 펼치고.
연필을 쥐고.
주변의 평범한 물건을 바라보며.
조용히 그림을 그리던 모습.
그리고 그 순간만큼은 세상 누구보다 행복해 보이던 표정.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도 그날을 떠올리면 영화 내용보다 먼저 그 장면이 생각난다.
충무로의 극장.
사람들로 가득한 로비.
테이블 옆에 놓여 있던 물병.
그리고 연필을 잡고 있을 때 가장 행복해 보이던 한 사람.
아마도 그 모습이 내가 기억하는 그녀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 중 하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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