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사과정에 다니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출판사에서 제안을 받았다. 일본에서 출간된 전자기술 서적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집필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국내에서 전자 분야 기술서적을 직접 집필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간혹 대학 교수님들이 한두 권 정도 출간하는 경우가 있었을 뿐, 대부분의 전문 서적은 해외에서 수입된 책들이었다.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작업이라 일어를 잘하는 친구의 여동생과 함께 집필을 시작했다. 일본 원서를 번역하고, 우리나라 환경에 맞게 내용을 수정하고, 디바이스의 구조를 다시 정리하는 작업이 몇 달 동안 계속되었다. 여동생은 퇴근 후에는 나와 원서를 번역하고, 번역된 내용을 국내에 맞게 새로 썼다.
http://youtube.com/shorts/OSGzrpDKnSQ?si=AhBxigmVb9cJmjBl
마침내 원고가 완성되었고 책은 출간되었다.
며칠 후, 출판사로 부터 교보문고에 책이 진열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날 나는 유경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유경아 교보문고 갈수 있어?”
“그래. 가자. 나도 책 볼게 있어.”

우리는 자연스럽게 서점을 걸었다. 신간 코너를 지나 전문서적 코너로 향했다. 책장에는 전자공학과 컴퓨터 관련 책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한 책 앞에 멈췄다.
유경이는 책장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그러다 한 권의 책을 집어 들었다.
잠시 표지를 바라보던 유경이가 말했다.

“어? 이 책 저자 이름이 네 이름이랑 똑같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나 맞아.”
유경이는 피식 웃었다.
“거짓말하지 마.”
유경이는 책뒤 약력을 읽기 시작했다.
몇 줄 읽던 표정이 점점 달라졌다.
“…어?”
다시 한 번 이름을 확인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어… 맞네.”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더니 웃으며 말했다.
“너무 신기하다.”
그 말 한마디가 지금도 기억난다.
평범한 대학원생에 불과했던 내가 책을 썼고, 그 책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서점의 책장 한 칸을 차지하고 있었다.
유경이는 책장을 넘기며 여기저기를 읽기 시작했다.
기술적인 내용이라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몇 페이지를 읽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어?”
유경이는 웃음을 참으며 책의 한 문장을 가리켰다.
“이 글… 사투리 같아.”
나는 그 문장을 다시 읽어 보았다.
그러고 보니 정말 그랬다.
서울에서 오래 생활하고 있었지만 글 속에는 아직도 고향에서 쓰던 말투와 표현이 조금씩 남아 있었다.
나도 따라 웃었다.
“그러네. 그때는 아직 사투리가 많이 남아 있었나 보다.”
유경이는 다시 몇 장을 넘기더니 말했다.
“내용은 어려워서 잘 모르겠는데, 이런 표현이 중간중간 있으니까 오히려 재미있네.”
그 말에 둘 다 한참을 웃었다.
교보문고를 나와 광화문 거리를 걸었다.

유경이가 나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내 친구 멋지네."
유경이는 언제나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친구였다.
전문 기술서라는 것은 딱딱하고 차갑기만 한 줄 알았는데, 내가 살아온 시간과 말투는 나도 모르게 문장 사이사이에 스며들어 있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책은 단순한 기술서가 아니었다.
젊은 시절의 열정과 밤을 새워 공부했던 시간, 처음으로 세상에 내 이름을 남겼다는 설렘( 사실 대학 때도 몇몇 기술 잡지에 연재를 하며 기고한 적이 있었지만. ) 그리고 그 기쁨을 가장 먼저 함께 나누고 싶었던 사람과의 추억까지 모두 담겨 있었다.
세월이 흘러 책은 절판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교보문고 책장 앞에서 유경이가 놀란 표정으로 내 이름을 바라보던 그 순간 만큼은 아직도 내 기억 속에서 새 책처럼 선명하다.
'CanvasMe-Once Upon Love'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유경이가 나를 기억하는 방식 (0) | 2026.07.11 |
|---|---|
| 시간이 지나 알게 된 사랑의 의미 (0) | 2026.07.11 |
| 유경이와 함께 달린 새벽 드라이브 (1) | 2026.07.11 |
| 유경이의 남자친구를 만났다. (0) | 2026.07.09 |
| 유경이의 미대 실기실 (0) | 2026.07.08 |
| 유경이와 미술 전시관 방문 (0) | 2026.07.07 |
| 서울랜드의 추억 (0) | 2026.07.07 |
| 해어 지자고 하는 여자친구 (0) | 2026.07.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