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유경이와 양주 근처로 야간 드라이브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우리는 광화문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광화문의 불빛은 낮보다 조용했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발길은 이어지고 있었다. 새벽 12시에 출발해 천천히 달리면 새벽 2시쯤 양주에 도착하고, 잠시 쉬었다가 새벽 4시쯤 다시 서울로 출발해 아침 6시 전에 유경이를 집에 데려다줄 계획이었다.
우리는 낮보다 밤에 더 자주 만났다. 서로 각자의 일상이 바빴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원 연구실 일로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있었고, 유경이는 미대에서 하루 종일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우리의 시간은 늘 밤이었다.
신기하게도 깊은 이야기도 대부분 밤에 나누었다. 낮에는 이런저런 소음과 사람들 속에서 대화를 하지만, 밤은 달랐다. 도시는 조용해지고, 마음도 조금은 느긋해졌다. 그래서인지 서로의 속마음을 꺼내 놓는 시간도 대부분 밤이었다.
유경이를 만날 때면 언제나 같은 모습이었다. 한쪽 어깨에는 물감과 스케치북이 들어 있는 커다란 미술가방을 메고, 또 다른 손에는 당시 여대생들이 흔히 들고 다니던 가방을 들고 있었다. 하루 종일 학교에서 그림을 그리고 나온 모습 그대로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유경이의 얼굴은 늘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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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하지 않을 리 없었다. 하루 종일 서서 그림을 그리고 과제를 하다 보면 몸도 지치고 정신도 피곤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를 만나러 올 때면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애처로운 마음이 들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집으로 돌아가 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유경이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를 만나러 나왔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고맙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미안했다.
‘혹시 내가 유경이를 너무 힘들게 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여러 번 했다.
물론 유경이의 진짜 속마음은 알 수 없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웃으며 나를 만나 주었지만 마음속으로는 ’너 때문에 피곤해 죽겠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사람의 마음은 겉으로 다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나를 만나러 와 주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했다.
그날도 광화문에서 유경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멀리서 천천히 걸어오는 유경이의 모습이 보였다.
발걸음은 무거워 보였다.

하루 종일 학교에서 보낸 피곤함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유경이의 표정이 환하게 바뀌었다.
아까까지 피곤해 보이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그 짧은 순간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나는 유경이가 너무도 고마웠다
나를 보면 웃어주는 그 모습.
우리는 광화문에 있는 작은 카페로 들어갔다.

창가 자리에 앉아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잠시 쉬었다.
카페 안에는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고 창밖으로는 늦은 밤 광화문의 불빛이 비치고 있었다.
나는 유경이에게 물었다.
“유경아, 오늘 힘들면 드라이브 가지 말까?”
“아니. 왜?”
“나 괜찮아!”
“응. 밤에 양주,장흥,송추 근처 한번 가보고 싶어.”
"그래 가자.”
우리는 카페가 문을 닫을 때까지 천천히 쉬다가 밖으로 나왔다.
지금과 달리 1990년대 광화문 근처는 밤이 되면 주차하기가 의외로 어렵지 않았다.
건물마다 조그마한 주차장이 있었는데, 회사 사람들이 모두 퇴근하고 나면 주차장이 텅 비어 있었다. 특별히 관리하는 사람도 없어 밤에는 무료처럼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요즘처럼 24시간 주차요금을 받는 시스템은 거의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런 모습도 이제는 하나의 추억이 되었다.
우리는 천천히 광화문을 출발했다.

차창 밖으로 서울의 가로등이 하나씩 지나갔다.
라디오에서는 조용한 음악이 흘러나왔고 우리는 음악을 들으며 천천히 북쪽으로 향했다.
굳이 서두를 이유는 없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목적지가 아니라 함께 있는 시간이었다.
가끔은 음악만 들었고, 가끔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침묵이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조용함이 편안했다.
새벽 2시쯤 양주 근처에 도착했다.
도로 옆 한적한 곳에 차를 세웠다.

주변에는 사람도 거의 없었고 멀리 가로등 몇 개만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고요함이 있었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잠시 밤공기를 마셨다.
시골이라 그런지 공기는 서울보다 훨씬 맑고 청량했다.
한여름이었지만 새벽 공기는 시원했다.
그곳에서 우리는 우리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앞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그리고 함께할 수 있는 미래는 어떤 모습일지.
그 대화의 내용을 지금은 모두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서로의 미래를 함께 이야기했다는 사실만은 또렷하게 남아 있다.
잠시 쉬다가 우리는 새벽 4시쯤 다시 서울을 향해 출발했다.
돌아오는 길은 갈 때보다 더 조용했다.
도로에는 차량도 거의 없었다.
창문을 조금 열어 두니 차 안으로 새벽 공기가 들어왔다.
맑고 시원한 공기가 마음까지 차분하게 만들어 주었다.
운전을 하면서 문득 옆을 바라보았다.
유경이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없이 내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보고 있었는지는 묻지 않았다.
그냥 그 시간이 좋았다.
신호등에 걸려 차가 멈출 때마다 나도 유경이 얼굴을 바라보았다.
서로 아무 말 없이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
유경이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저려 왔다.
좋아하는 감정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애틋함이 있었다.
그 사람이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마음.
그 사람이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
그리고 이 시간이 오래 계속되기를 바라는 마음.
그 모든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그 순간 문득 영화 *사랑과 영혼(Ghost)*이 떠올랐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만으로도 마음이 전해지는 장면들.
우리도 그 영화 속 두 사람처럼 말보다 눈빛으로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흘러간다.
그날도 결국 새벽은 지나고 아침이 다가왔다.
우리는 다시 서울에 도착했고, 약속했던 시간에 맞춰 유경이를 집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짧다면 짧은 하룻밤이었지만, 그 밤은 나에게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시간이 되었다.
화려한 여행도 아니었고, 특별한 관광지를 찾아간 것도 아니었다. 그저 광화문에서 출발해 양주까지 다녀온 평범한 드라이브였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달린 그 한밤의 도로, 새벽 공기, 차 안을 가득 채우던 조용한 음악, 그리고 서로를 바라보던 눈빛은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내 기억 속에서 조금도 흐려지지 않았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 새벽 양주의 차가운 공기와 유경이의 환한 미소는 어제 있었던 일처럼 선명하다.
인생에는 거창한 사건보다 이런 평범한 하루가 더 오래 기억될 때가 있다.
나에게 그날의 야간 드라이브는 그런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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