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경이와 광화문에서 저녁 6시에 만나기로 했다.
우리는 자주 광화문 근처의 지하 카페에서 만났다. 특별한 약속이 없어도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했고, 서로 늦지 않게 도착하는 것이 당연한 약속처럼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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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도 우리는 정확히 6시에 만났다.
반갑게 인사를 나눈 뒤 유경이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 맥주 한잔할까?”
“좋아.”
유경이는 크라운베이커리 근처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2층에 카페처럼 생긴 호프집 있어. 분위기 괜찮더라.”
우리는 계단을 올라 작은 호프집으로 들어갔다. 실내는 일반 호프집보다 훨씬 조용했다. 은은한 조명과 나무 테이블 때문에 카페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창가 자리에 앉아 500cc 생맥주 두 잔을 주문했다.

잔이 나오자 서로 가볍게 부딪쳤다.
“짠.”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시작했다. 학교 이야기, 동아리 이야기, 앞으로 하고 싶은 일들까지. 특별한 주제는 없었지만 함께 있는 시간이 즐거웠다.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허리춤에서 삐삐(BB)가 울렸다.
그 시절에는 휴대전화가 없었기 때문에 삐삐가 울리면 근처 공중전화나 전화기를 찾아야 했다.
나는 양해를 구하고 호프집에 있는 전화를 빌려 동아리실로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형, 어디예요?”
“나 여자친구랑 광화문에서 맥주 마시고 있어.”
“저도 갈게요.”
나는 유경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후배가 잠깐 온다는데 괜찮아?”
유경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었다.
“응. 와도 돼.”
그 후배는 유경이도 한두 번 정도 함께 본 적이 있는 동아리 후배였다. 낯선 사이는 아니었기에 부담은 없었다.
30~40분쯤 지나 후배가 호프집으로 올라왔다.
“형.”
“왔냐.”
후배는 유경이에게도 정중히 인사했다.
“누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
후배는 자연스럽게 유경이 옆자리에 앉았다.

맥주를 한 잔 더 주문했고 세 사람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학교 이야기, 동아리 이야기, 군대 이야기….
후배는 원래 술을 꽤 잘 마셨다.
유경이도 생각보다 술이 센 편이었다.
반면 나는 술이 약해서 천천히 마시는 편이었다.
결국 내 잔은 아직도 절반 이상 남아 있었는데 두 사람은 이미 여러 잔을 비우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두 사람의 얼굴은 점점 붉어졌다.
평소 차분하던 유경이도 조금씩 말이 많아졌다.
웃음소리도 커졌고, 사소한 이야기에도 크게 웃었다.
나는 그런 모습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오늘은 유난히 많이 마셨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유경이가 갑자기 후배의 손을 잡았다.
후배도 당황한 표정으로 웃었다.
유경이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내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내가 이래도 화 안 나지?”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후배도 술기운에 장난을 받아쳤다.
“형, 이제 유경 씨랑 저랑 사귀는 겁니다.”
둘 다 웃고 있었다.
분명 장난이었다.
하지만 술이 들어간 장난이라 더욱 과감했다.
나는 괜히 질투하거나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럼 난 집에 가야겠네.”
세 사람 모두 크게 웃었다.
조금 뒤 유경이가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술기운 때문인지 눈빛은 평소보다 훨씬 진지했다.
“너.”
잠시 말을 멈추더니 다시 말했다.
“너 나 사랑하는 거 맞아?”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나는 웃으며 대답하려 했지만, 유경이는 내 대답보다 먼저 말을 이어갔다.
후배도 내 편이 아니라 유경이 편을 들었다.
“형.”
“누님 좋아 하는거 맞아!.”
“이렇게 예쁜 누님을 다른 사람이 데려가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유경이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봐. 동생이 내 마음을 잘 아네.”
유경이는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나 사랑하면.”
그리고 후배를 가리켰다.
“동생 보는 앞에서 확인시켜 줘.”
나는 잠시 웃었다.
그렇게 어려운 부탁은 아니었다.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몸을 조금 숙여 유경이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유경이는 순간 활짝 웃었다.
후배는 손뼉까지 쳤다.
유경이는 만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할 줄 아네.”
“매일매일 이렇게 해.”
그 말에 셋 다 크게 웃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귀여운 장면이었다.
평소의 유경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다.
술이 들어가니 평소 마음속에 있던 감정이 조금 더 솔직하게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날 유경이는 내가 기억하는 동안 가장 많이 취한 날이었다.
말도 평소보다 많았고, 웃음도 많았으며, 애정 표현도 훨씬 솔직했다.
후배 역시 술기운에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시간이 꽤 늦어지자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산을 마치고 함께 호프집을 나왔다.
여름밤의 광화문은 아직도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시원한 밤바람이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후배는 길가에서 택시를 잡으며 말했다.
“누님, 형.”
“저 먼저 갈게요.”
그리고 유경이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오늘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유경이도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조심해서 가요.”
후배가 탄 택시는 천천히 광화문 거리를 벗어나 사라졌다.
이제 다시 우리 둘만 남았다.
유경이는 아직도 술기운이 남아 있었다.
볼은 붉게 물들어 있었고 걸음도 평소보다 조금 느렸다.
나는 말했다.
“우리 천천히 걸어갈까?”
유경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날은 택시를 타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술을 깨게 하고 싶었고, 무엇보다 둘이 함께 걷는 싶었다.
우리는 광화문을 뒤로하고 천천히 유경이 집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여름밤의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술에 취한 유경이는 가끔 내 팔을 잡고 기대기도 하고, 아무 말 없이 웃기도 했다.
조금 전 호프집에서 있었던 장난스러운 일들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날 유경이가 원했던 것은 거창한 사랑의 증명이 아니었던 것 같다.
사람들 앞에서 자랑할 만큼 특별한 이벤트도 아니었고, 값비싼 선물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을 아끼고 사랑한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표현해 주기를 바랐던 것인지도 모른다.
술기운 속에서 내뱉은 말들이었지만, 그 안에는 평소 쉽게 표현하지 못했던 마음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광화문의 불빛 아래에서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천천히 걸었다.
그날 밤의 맥주 한 잔과 유경이의 환한 웃음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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