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경를 어머님께 인사 시키던 날.
아버지는 청량리에서 작은 극장을 운영하셨다. 극장에는 영사 기사 두 분, 청소를 맡으신 두 분, 매표소 한분, 그리고 매점을 운영하시는 두 분이 계셨다. 개봉관에서 상영을 마친 필름을 받아 상영하는 극장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버지는 극장에 출근하셔서 집에 안계셨다.
우리 집은 시장 근처에 있었는데 당시에는 비교적 넓은 집이었다. 하지만 집 앞 도로를 확장하는 도시계획이 진행되면서 대지의 절반 이상이 편입되었다. 보상금으로 다른 곳으로 이사하는 것도 생각하셨지만, 오래 살아온 동네였고 이웃들과의 정이 깊었던 부모님은 그 자리에 작은 3층 상가주택을 새로 지어 계속 살아가기로 하셨다.
내가 여섯 살 무렵, 할머니(고모할머니)께서는 큰 영화관을 운영하시는 분이셨다. 정부의 고위 공직자분과 결혼하여 아들2,딸2을 낳으시고, 막내가 15세 되던 해에 이혼하셨다고 했다. 그리고 영화관 사업을 시작하셨고, 아재 둘은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고, 아지매 둘은 의대교수와 사업하시는 분과 결혼을 하셔서 할머니는 그 큰 극장에서 혼자 계셨다. 할머니가 외로우셨는지 시골에 살던 우리 가족을 서울로 불러. 극장 사옥에서 살게 하셨고, 아버지는 영화관 관리 총 운영을 맡아 하셨다.
그 시절 아버지는 영화배우와 코미디언, 영화사 관계자들과도 자주 교류하셨던 것 같다. 어린 나는 구봉서 선생님과 배삼룡 선생님을 직접 본 기억이 있고, 특히 코메디언 배연정 선생님은 할머니와 매우 가까운 사이셨다고 했다. 그 밖에도 많은 유명 영화 배우들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내가 일곱 살이 되던 해였다.
어느 날 신문 1면에 할머니의 전남편, 나에게는 할아버지였던 분의 부고 기사가 크게 실렸다. 어린 나는 그 기사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집 안을 감싸던 무거운 공기만은 또렷이 기억한다.
평소 언제나 밝게 웃으시며 내 앞에서는 슬픈 기색 한 번 보이지 않으셨던 할머니는 그날만큼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신문을 한참 바라보시던 할머니의 눈빛은 깊은 곳 어딘가를 향해 머물러 있었고, 얼굴에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세월과 그리움이 서려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처음으로, 어른들의 슬픔에는 소리 없는 침묵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어린 마음에도 가슴 한편이 먹먹했고, 왜인지 모르게 눈앞의 할머니가 너무 작고 외로워 보였다.
세월이 흘러 그날을 떠올려 보면, 할머니가 잃은 것은 한 사람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함께했던 시간, 젊은 날의 기억,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한 시대까지도 조용히 떠나보내고 계셨던 것은 아닐까.

그날 신문 1면의 부고 기사보다 더 선명하게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아무 말 없이 신문을 바라보시던 할머니의 뒷모습이다. 그 침묵은 어떤 눈물보다도 더 깊고, 더 오래 내 마음에 남아 있다.
1970년 무렵에는 극장이 영화계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배우들과 영화사 관계자들 역시 극장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극장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겼다. 지금과는 많이 다른 시대였던거 같다.
아버지는 할머니를 무척 좋아하셨다. 그리고 할머니는 여러 손자들 중에 유독 나를 예뻐해 주셨다. 맛있는 것이 생기면 언제나 가장 먼저 나를 챙겨주셨고, 설날에 세뱃돈도 몰래 더 챙겨 주셨다. 할머니를 생각하면 좋은 생각만 난다. 그 당시 할머니 나이가 48세 셨던거 같은데 엄청 미인셧다. 할머니와 자가용을 타고 가다가 함께 내려서 할머니 손을 잡고 걸어가면, 많은 아저씨들이 쳐다본 기억이 나고, 엄마 이야기로는 젊은 남자가 할머니를 뒤따라 오다가 나이를 듣고, 돌아간 남자들도 많았다고 하시며 웃으셨다.
내가 커서 할머니 사진을 봤는데 영화 배우처럼 이뻣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분 사진을 정리 하신다고 하시면서 모두 태워버리셨다. 너무 아쉬웠다.

할머니는 내가 과학을 좋아하는 것을 잘 알고 계셨다. 아폴로 달 착륙 생중계가 있던 날에는 나를 불러 TV 앞에 앉혀 주셨고, 어머니께는 “저놈은 나중에 과학자가 될끼다. 잘봐라.“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어린 나에게는 그 말이 얼마나 큰 기대였는지 그때는 알지 못했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도 그 말씀은 따뜻한 격려처럼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갑자기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라 이야기가 조금 길어졌다.
그날은 유경이를 부모님께 처음 소개하기로 한 날이었다.
집 안은 정리되지 않아 조금 어수선했지만 더 미룰 수는 없었다. 유경이도 많이 긴장한 모습이었다. 나는 “친구 집에 놀러 온 것처럼 편하게 있으면 된다.“라고 말했지만, 유경이의 표정에서는 긴장이 그대로 느껴졌다.
우리 집에는 대학 동아리 후배들도 종종 놀러 왔기 때문에 어머니께서 크게 부담스러워하시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집에 여자친구는 처음 데려 와서 인지 어머니도 긴장하신 듯 보였다. 물론 유경이는 더할나위 없이 긴장 한 것 처럼 보였다.
조금은 어색한 첫 만남이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편하게 앉으라고 말씀하셨지만, 유경이는 끝내 편안해 보이지 않았다. 한 시간 정도 함께 이야기를 나눈 뒤 우리는 집을 나와 잠시 거리를 걸었고, 나는 유경이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부모님을 처음 뵌 날이었던 만큼 유경이도 많이 긴장했고, 충분히 쉬어야 할 것 같았다.

다음 날 저녁, 어머니께서 조용히 나를 부르셨다.
“그동안은 네 여자 후배들만 보다가 여자친구가 온다고 하니 나도 조금 긴장되더라. 그런데 유경이가 말도 잘하고, 참 예쁘고, 좋은 부모님 밑에서 바르게 자란 아이 같더라.”
“엄마, 예쁘지?”
“그런데 유경이. 어머님만 계셔”
그러자 어머니는 “어머님만 계신다고, 어머님이 아이들 키우시느라 많이 힘드셨겠구나.”
잠시 후 어머니께서 다시 물으셨다.
“결혼할 생각이니?”
“응. 우리 결혼 하자고 했어.”
그러자 어머니는 환하게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나는 좋다. 네가 좋아하는 것에 만 너무 애쓰지 말고, 여자 친구 마음 고생 시키지 말고, 많이 아껴 줘라.”
“응, 엄마. 신경 쓸게.”
어머니는 언제나 다정한 분이셨다. 아버지 때문에 마음 고생도 적지 않으셨지만, 자식들이 바르게 살아가는 모습을 가장 큰 행복으로 여기셨다. 따뜻한 미소와 조용한 격려로 언제나 내 곁을 지켜주셨고, 그날 해주신 말씀은 지금도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아 있다.
그리고 지금도 그날을 떠올리면 어머니의 따뜻한 미소와, 긴장하면서도 끝까지 예의와 미소를 잃지 않았던 유경이의 다정한 모습이다.
두 사람이 처음 마주했던 그날의 풍경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내 마음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하지만 나는 엄마 말대로 하지 못 했다. 유경이를 신경쓰이게 했고, 아껴주지 못했다.
https://youtube.com/shorts/nEsIsdjgsGk?si=cvLJArsicSNdLc_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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