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경이와 미술 전시회를 보기로 한 날이었다.
아침부터 마음이 설렜다. 놀이공원을 가는 것도 아니고 여행을 떠나는 것도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발걸음이 가벼웠다. 오늘은 유경이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 가운데 하나인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을 함께 가는 날이었다. 미술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던 나는 그저 유경이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우리는 전철을 타고 도심을 벗어나 과천으로 향했다. 창밖 풍경은 조금씩 달라졌다. 빽빽하게 늘어선 빌딩 대신 나무가 많아졌고, 분주한 도심의 소음도 점점 멀어졌다.
유경이가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는 올 때마다 마음이 편해져.”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공기가 다른 것 같네.”
지하철역에서 내려 조금 걸어가자 숲속에 자리한 국립현대미술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넓은 잔디와 나무들 사이에 자리한 건물은 도심의 미술관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여기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미술관이야.”
유경이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미소를 보니 오늘 이곳에 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시장 안으로 들어가자 조용한 음악과 함께 차분한 분위기가 우리를 맞이했다. 사람들은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했고, 작품 앞에서는 오래 머물며 감상하고 있었다.
첫 번째 전시실에는 커다란 추상화가 걸려 있었다.
나는 그림을 한참 바라보다가 유경이를 보며 웃었다.

“이분은 화가 많았나 봐. ㅋㅋ”
유경이가 피식 웃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온통 빨간색이잖아. 엄청 화난 것처럼 보여.”
유경이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렇게 보는 사람은 처음 봤어.”
“내 눈에는 그런데?”
“빨간색이 꼭 화를 의미하는 건 아니야. 사랑일 수도 있고, 열정일 수도 있고, 생명의 에너지일 수도 있어.”
나는 다시 그림을 바라보았다.
“아… 그러니까 보는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는 거구나.”
“맞아. 미술에는 정답이 없어.”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난 아직 화가 많이 난 것처럼 보이는데.”
유경이는 웃으며 내 어깨를 살짝 툭 치더니 말했다.
“너랑 미술관 오니까 진짜 재밌다.”
“왜?”
“다른 사람들은 어려운 말만 하는데, 넌 있는 그대로 말하잖아.”

“난 잘 모르니까 솔직하게 말하는 건데.”
“그게 더 좋아. 미술은 원래 그렇게 느끼는 거야.”
우리는 다음 전시장으로 걸어갔다.
이번에는 풍경화와 인물화가 전시되어 있었다.
유경이는 작품 하나하나 앞에서 조용한 목소리로 설명해 주었다.
“이 화가는 빛을 정말 중요하게 생각했대.”
“이 그림은 전쟁이 끝난 뒤 사람들의 허무함을 표현한 거래.”
“이 조각은 일부러 거칠게 만들었어. 완벽하지 않은 인간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래.”
설명은 길지 않았지만 신기하게도 그림이 조금씩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전자공학을 공부해 온 내게 세상은 숫자와 공식으로 설명되는 곳이었다.
하지만 미술은 전혀 달랐다.
같은 그림을 보고도 사람마다 느끼는 것이 달랐다.
누군가는 희망을 말했고, 누군가는 외로움을 떠올렸으며, 또 다른 사람은 자신의 추억을 이야기했다.
나는 조용히 말했다.
“전자공학도가 미술품을 보는 건 정말 다른 세상을 접하는 것 같아.”
유경이가 미소를 지었다.
“맞아. 그래서 미술이 재미있는 거야.”
“공학은 정답을 찾는 건데, 미술은 정답이 없네.”
“대신 사람마다 답이 다른 거지.”
그 말이 오래 마음속에 남았다.
다음 전시장에는 거대한 설치미술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천장에서 수백 개의 유리 조각이 매달려 있었고, 조명이 비칠 때마다 반짝이며 천천히 흔들렸다.
나는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말했다.
“이건 정말 사진으로는 표현이 안 되겠다.”
“그래서 직접 보는 게 중요해.”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작품을 바라보았다.
그 침묵마저도 편안했다.
또 다른 전시장에서는 영상 작품을 감상했다.

사계절이 천천히 바뀌는 숲과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이 느린 화면으로 이어졌다.
영상이 끝난 뒤 유경이가 말했다.
“난 이런 느린 작품이 좋아.”
“왜?”
“바쁘게 살다 보면 놓치는 게 많잖아. 미술은 잠깐이라도 멈춰서 바라보게 해 주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경이를 만나기 전의 나는 늘 효율만 생각하며 살았다.
빠르게.
정확하게.
실수 없이.
하지만 유경이는 내게 천천히 걷는 법을 알려 주었고, 조용히 바라보는 법을 알려 주었으며, 이유 없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마음도 알려 주고 있었다.
전시를 모두 둘러본 뒤 우리는 미술관 밖으로 나왔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숲 사이로 부드럽게 스며들고 있었다.
잔디 위에 앉아 잠시 쉬며 커피를 마셨다.
나는 유경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고마워.”
“갑자기?”
“오늘 아니었으면 평생 미술관에 와도 그냥 지나쳤을 거야.”
유경이는 잔잔하게 웃었다.
“작품은 내가 설명했지만, 느낀 건 네 마음이야.”
그 한마디가 오래 남았다.
전자공학을 공부해 온 내게 미술은 늘 어렵고 낯선 세계였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유경이의 설명 덕분에 그림은 단순한 색이 아니라 화가의 마음이 되었고, 조각은 차가운 돌이 아니라 삶의 이야기가 되었으며, 전시장은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이 아니라 사람의 감정을 만나는 공간이 되었다.
그날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가장 기억에 남은 작품이 무엇이었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대신 이렇게 말할 것 같다.

“그날 가장 아름다웠던 작품은 전시장 벽에 걸린 그림이 아니었다. 작품 하나하나를 조용히 설명해 주며 내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 준 유경이였다. 덕분에 나는 미술을 감상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조금 더 넓게 바라보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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